17
선화는 준수를 자신에게서 떠나보내기 위해 준수한테 매몰차게 대했다. 하지만 준수는 선화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항상 선화의 병실을 찾아왔다. 준수는 선화를 씻겨주었으며, 옷을 갈아 입혀 주었고 병실을 예쁘게 꾸며주었다.
일요일이었다. 오전에 준수 어머니가 찾아왔다. 선화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준수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준수 어머니가 선화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와서 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니야. 괜찮아. 몸은 좀 어떠니?”
“괜찮습니다. 준수씨도 잘 보살펴 주고...”
“사실 준수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준수 어머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한텐 미안한 얘기다만 준수를 너하고 결혼 시킬 수는 없어. 그런데도 그 녀석은 자꾸 너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니... 니가 준수를 설득해 주면 안 되겠니?”
선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준수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지금 처지가 너무나도 서러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몸으로 준수씨랑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런 몸으론 준수씨한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걸요.”
“고맙다. 어쩌다 니가 이런 꼴이 되어가지고. 그런 바보같은 짓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준수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을까?’
선화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한 사람을 살려내긴 했지만 그 희생으로 잃는 것이 너무 많았다. 다시 옛날로 돌아갔을 때 그 상황이 또 닥친다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그럼 갈게.”
준수 어머니는 떠나고 선화는 병실에 홀로 남았다. 선화는 눈을 감았다. 혼자선 잠을 청하는 것 말고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후에 선화는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는 준수가 앉아 있었다. 준수는 웃는 얼굴로 선화를 맞았다.
“언제 온 거야?”
“1시간쯤 전에.”
“그럼 깨우지.”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어. 뭐 하고 싶은 것 없어?”
“오늘 일요일이지? 성당에 가고 싶다.”
“성당? 그럼 가자.”
준수는 우선 선화의 옷을 갈아 입혀 주고 화장을 해 준 후 거울을 보여 주었다.
“어때? 괜찮아?”
선화는 눈을 깜밖였다. 그것은 선아의 OK사인이었다.
선화의 OK사인이 떨어지자 준수는 병실을 나가더니 금방 휠체어를 구해 가지고 와서는 선아를 휠체어에 앉혔다.
준수와 선화는 명동성당을 찾았다. 김 신부는 준수와 선화가 온 것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 했다. 선화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준수는 휠체어를 밀며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고 성모 마리아상만이 벽에 걸려 있었다. 선화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준수는 선화의 기도에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숭고한 기도였다.
기도를 끝낸 후 준수와 선화는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다 지나갔는지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전에 어머님이 왔다 가셨어.”
“우리 어머니가?”
“널 그만 놓아 주었으면 한대. 그리고 그건 내 바람이기도 해. 더 이상 널 묶어 둘 수가 없어. 난 이제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걸.”
“나한테 아무 것도 못해 줘도 상관 없어.”
“바보같은 소리 좀 그만해. 평생 내 간호만 하겠다고 살겠다는 거야? 그런 걸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어떡해야 내 마음을 받아 줄 거니? 어머니가 반대할 거라는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어.어머니가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별 수 없어. 어머니를 버리고 너를 선택하는 수 밖에.”
“미쳤어? 한 분 밖에 안 계신 니 어머님이셔.”
“하나 밖에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니가 이런 몸으로라도 깨어나기라도 한 걸 내가 얼마나 감사해 하고 있는지 알아. 그 때부터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로 결심했어.”
선화의 감정에 변화가 있었는지 선화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선화는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만 돌아가자.”
준수는 선화의 휠체어를 밀며 성당을 나왔다.
준수는 선화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 건너편에 금은방이 보였다. 성당에 갔다 와서인지 준수는 선화가 항상 하고 다니던 금십자가 목걸이가 생각났다. 사고 이후 선화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준수는 금은방으로 가서 금십자가 목걸이를 사 가지고 나와서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선화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준수를 보고는 조금 놀랐다.
“왜 다시 왔어?”
“줄 게 있어서.”
준수는 금십자가 목걸이를 꺼내 가지고서는 선아의 목에 걸어 주었다.
“넌 이걸 하고 있는 게 어울려.”
“고마워. 하지만 더는 이러지 마. 계속 이러면 정말 나 너한테 모든 것을 의지할 지도 몰라.”
“상관 없어. 그만 갈게.”
준수는 병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