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래' 하면 '더럽다' 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깨끗이 빨아 놓은 걸레도 만지려고 하면 꺼림칙하지.
더구나 더러워진 걸레를 씻으라고 하면 반갑게 여길 이 어디 있을까?
언제나 더럽다는 걸 앞세우니까 걸레를 놓아두는 곳도 밝지 못한 구석이다.
그렇게 걸레가 더럽고 냄새가 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맘 알아주는 이 참으로 드물다.
우리집엔 걸레가/ 네 개다./ 우리 방엔/ 다 떨어진 런닝구 걸레다./ 떨어진 하얀 런닝구를/
하도 닦아서 시커멓다./ 엄마가 방에서 우릴 때릴 때도/ 걸레로 때려서/ 더 찢어졌다./
빨아도 빨아도/ 시커멓게 찌든 때는/ 안 빠진다./ 내 동생이 토한 것도/ 이 걸레로 닦는다./
어떨 때는 비누로 빠는 데도/ 진득하다./ 우리집엔 나무로/ 불을 때기 때문에/
그을음도 많다./ 그것도 걸레로 닦는다./ 다 떨어져서 너덜너덜하지만/
아직도 그 걸레로 닦는다./ 걸레는 자기 몸이 더럽혀져도/ 다 닳을 때까지/
더러운 것을 닦아 주는/ 착한 걸레다. (<걸레>, 1995.2.17, 청도 덕산초등 6학년 '박미경'의 시)
더러운 것을 닦아 주니 걸레는 참으로 착하다.
내 옷에 구정물 한 방울 튀길까 천리만리 달아나는 세상에 자기 몸으로 남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 주기가 어디 쉬운가.
그런 '착함' 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다.
걸레로 쓰는 재로만 봐도 고급스럽지 않고 떨어진 런닝셔츠 같은 것이다.
걸레가 하는 일도 겉보기에는 언제나 천하다.
언제나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야 볼 수 있고, 할 수 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걸레 같은 자식!' 이렇게 욕을 하기도 한다.
치사하고 더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욕이지만 걸레가 하는 높고
귀한 일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걸레에 견주어 업신여기는 말은 삼가야 한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걸레가 더욱 더럽고 냄새가 나게 되는 건 필요할 때 더러운 것을 닦아 내면서도
닦고 나면 구석에 나 몰라라 처박아 두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구석은 내버려 두고 눈에 보이는 곳만 빤질빤질하게 닦아 내보이며,
깨끗이 빨지 않은 걸레를 구석에 처박아 두는 건 위선이다.
'위선' 이라는 귀신이 우글거리는 사회는 썩어 넘어지게 된다.
내 맘속의 위선도 스물스물 기어 다니게 그냥 두면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화가 몹시 나서 욕을 하더라도 '걸레 같은 자식!' 이렇게 걸레를
견주어 욕하지 마라. 걸레 같은 사람을 몹시 짓밟는 말이다.
교사 이호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