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야, 옷 입어라. 내일 오빠 수능 치러 가는데 보온병 사서 따뜻한 물 담아 보내자."
딸아이와 함께 어두워지는 길에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솔직히 아들아이 실력이 안 돼 좋은 대학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전문대는 꼭 보내고 싶었다.
우리집 큰아들 재석이의 엄마가 돼 주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는 정이 고픈 듯 보였고, 코를 얼마나 닦았는지 소맷자락이 풀 먹인 듯 빳빳했다.
그 애가 어느덧 자라 수능을 본다니 그저 신통하고 기뻤다.
그런데 그 아들이 시험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라면 엄마아빠보다 더 따르는 딸아이 주는 용돈을 아껴서 선물한
합격엿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큰집 누나와 큰엄마까지 일부러 와 있는데...
학교며 친구들 집에 연락을 해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누구보다 걱정되고 가슴 떨리는 사람은 나인데, 시어른들이 툭 던지듯 한마디하셨다.
"네가 계모라서 아이 찾는 데 소홀한 게 아니냐!"
순간 8년 세월 동안 재석이를 내 안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울고 또 울었던 일이 떠올랐다.
모든 게 무너지는 듯했다.
사실 내 마음 한쪽에서는 계모라서 대학 안 보냈다는 말이 듣기 싫어
알게 모르게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는데...
내 착한 아들은 그날 자정 무렵 돌아왔다.
아들을 부둥켜안는 순간 기쁨과 미움의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아들녀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엄마, 엄마..."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하는 재석아, 넌 엄마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이렇게 나이 어린 아내를 믿고 마음가는 대로 키울 수 있게
아들을 맏겨 준 남편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박숙자 님/ 경남 고성군 서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