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자신을 평가한다면 그리 높지않은 점수를 매길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결점이 많은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도 나의 주변사람들은 나를 [착하다]라는 말과 연관시킨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리 착한 편이 아닌데...그럼 누가 나를 착한사람으로 보이게 만든 것일까?
[1]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의 나의 목표는 목동도서관(지금의 양천평생교육관)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는 것이었다. 어떨때는 공부하고 어떨때는 시간을 때우고 어떨때는 발만 드리밀고 다시 나온적도 있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나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해 여름방학 내내..
어느날 점심을 먹기위해 도시락 풀었을때 도시락위에 조그마한 쪽지가 한 장 놓여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로 시작한 어설픈 글씨체는 "~~가방을 짊어진 너의 어깨가 너무도 자랑스럽다."라는 말로 마무리가 되어있었다. 군데군데 벌레먹은 듯 눈에 띄는 오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글귀를 몇 번이고 읽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착하게 만드셨다.
[2]
불현듯 아버지가 뵙고 싶었다.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되돌아온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갈때쯤이었다. 다짜고짜 기차에 올랐다.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소주를 사가지고 가야하나라는 허망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 날 나는 빈손을 털레털레 흔들며 아버지 묘지에 다달았고 1시간가령 앉아있다가 되돌아왔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가벼웠던것으로 기억된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훌쩍훌쩍 울고 계셨다. 어머니 친구들과 과일을 가운데두고서 어머니는 그렇게 눈물을 훔치시고 계셨다. 얘기도 안하고 한나절을 나갔나가 돌아온 아들이 걱정이 되서 그러시나했다. 그래도 기차타고 되돌아올때 분명히 전화를 한 터였다. 아무상황도 모르던 나는 "저 왔어요"라는 말을 던졌다. " 아들하나는 잘 키웠네"라며 주변에 계시던 친구분들이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연인 즉, 내가 아버지께 다녀온 그 주 일요일이 아버님 기일이셨던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버지 기일을 기억하고 그리 행동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도 따뜻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었다.
난 단지, 불현듯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리했던 것 뿐인데....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나를 착하게 만드셨다.
[3]
바다가 보고 싶었다. 회사일과 대학원 공부에 지친 나는 무작정 바다를 보기 위해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바다를 보고 나면 지치고 헤이해졌던 나의 마음을 다시한번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이와 관련된 글은 "난 오늘도 정동진에 가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기대했던데로 바다는 나를 반기었다. 시원하게 나의 뇌리까지 파고드는 바람과 온 몸으로 스며드는 바다내음을 한 껏 즐겼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홀로 계신 어머니께 [저, 바다 좀 보고 올께요]라는 말만 남기고 온 터라 걱정하실 어머니께 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차가움이 흐드러진 새벽녘에 전화벨이 울리고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좋냐?]라는 물음에 [그럼, 좋지]라고 말했다. [엄니,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맞춰봐?]하며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쭈욱 밀었다. 좀 더 크게 들으시라고...[이거, 파도소리야, 들려?] 짧은 대화가 오고간후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날이 어머니 생신날이셨던 것이다. 당신 아들이 생일선물로 파도소리를 주었다면 온 동네를 떠들고 다니셨다는 것이다. 난 무진장 부끄러웠다. 난 단지 나의 피로함을 깨기 위해 갔었던것 뿐인데....어머니는 그렇게 나를 착하게 만드셨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상황을 만드셨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주변사람들로부터 포근하고 정많으며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져갔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나를 착하게 만드신 것이다.
나를 언제나 착하게 만들어주시는 어머니께서 오래오래 옆에 계셨으면 한다. 그래서 이 못난 아들이 어머니덕분에 착하다라는 말을 더욱 자주, 더욱 오랫동안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