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나는 베이비붐이라는 시기에 태어난 죄로 엄청나게 불어난 13:1 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내가 원하는(?) 대학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속박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훨훨 날아갈 것만 같던 대학문턱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는 커녕 고등학교와는 다른 책임이라는 굴레를 얽어매었다. 어쩌면 책임이라는 굴레가 그 어떤 족쇄보다도 더 무섭고 버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햇병아리처럼 삐약삐약대며 책임의 굴레를 느끼기전까지 나에게도 대학이라는 곳에서 하고 싶었던 낭만적이 꿈이 있었다. 비록 이공계열이었지만 글이 쓰고 싶었고 결국 나는 대학신문사 시험을 치루어서 합격했다. 나만 빼고는 모두 인문계열 친구들이었다. 그들보다 더 많은 강의시간을 빼먹지않고 수강하면서도 나는 악바리같이 뒤지지않도록 입술을 깨물었었다.
그 무렵, 내가 갖고 있던 낭만적인 꿈은,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대학4년동안 내가 꼭 해야할 목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책 400권을 읽고 사람 400명을 만나는 것이었다. 왜 그런 목표를 세웠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책을 통해 삶을 배워야하고 자신이 걷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며 경험을 쌓아가야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었던것 같다.
한 선배가 제주도에 갔다가 엽서를 보내왔다. 담이 없는 제주도 집을 보면서 서로의 인생을 넘나들며 공유하고싶다고 했었다. 아마 나도 그리하고 싶었던것 같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이든, 그렇지 아니하든 서점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그리고 책을 샀다. 책을 살 돈이 없으면 책방 어느 한 구석에 쳐박혀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책을 읽곤했다. 그것도 힘이들면 학교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책을 읽는다는 재미보다는 책을 모은다는 편이 더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에릭시걸의 '닥터스'를 읽으며 재수를 생각하기도 했고 사회과학서적을 읽으며 두손을 불끈불끈 쥐었다가 놓기도 했으며 동화책을 읽으며 엷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대학 1학년생의 400권 독파라는 꿈은 조금씩 조금씩 그 탑을 쌓아갔지만 어느새부턴가 나는 권수를 세지 않았다. 그 무의미한 행위의 바보스러움을 깨닫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부턴가 책을 사지 않았다. 소유의 기쁨보다는 느낌의 행복을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나는 학교도서관만을 이용했다. 그리고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되면 이미 다 읽어버린 그 책을 사기위해 서점을 찾곤 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보다 더욱 힘이 들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신문사 기자였으므로 그나마 수월했다고 할 수 있다. 학교사무처의 모든 직원들과는 이미 한번씩 목례를 한 사이이고, 교내에서 스치는 얼굴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이미 본 얼굴들이었다. 모임이 있으면 빠지지않고 나갔고, 회의나 집회, 관람, 설명회등 각종 행사가 있는 곳에도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시간이 지난후에, 내가 아는 사람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이름 석자가 찍힌 신문기사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똑똑하고 두드리면 커피한잔정도는 무료로 얻어마실수도 있었다. 걔중엔 나에게 적대감을 갖고 으르렁대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의 대학 1학년생의 꿈과 목표는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이 되었다.
벌써 졸업을 한지가 6년이 되어간다. 400권이 채 안되게 읽었던 책들의 제목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쏟아져나오는 출판물에 채여 더이상 쫒아갈 수 없게 되었다. 베스트셀러라는 것에 얶매여 읽어야하고 헌책방을 찾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또한 400명이 채 안되는 사람들의 주소나 전화번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자주만나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만이 내 곁에서 나의 넔두리를 듣는데 여념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을 사귄다는것에 두려움마저 든다.
대학 1학년생에게 있어서 400의 의미는 그렇게 시작해서 사라져갔다. 아직도 완성하지 않은 그 꿈과 목표는 400의 단순한 숫자적 인식을 넘어서고 있다. 그 숫자의 무거움을 함께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