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부산 시내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서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장림(長林)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내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장림'은 이름 그대로 온 동네가 긴 갈대 숲으로 덮여있었다. 그 때 정부에서는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서민들에게 가구 당 십여 평씩의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그 곳에 정착토록 하는 이주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도 수많은 서민대열에 끼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특히 서민의 생활이란, 주거공간이 바로 생업 현장이기 때문에 온 가솔들을 이끌고 먼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하며 미루던 우리 가족은 거의 막바지쯤에야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간 저축해 놓았던 돈에, 은행 융자까지 얻어 가까스로 새 집을 짓게 되었다. 워낙 터가 좁은지라 정원은 없었지만 우리 집의 뒷산이 바로 나의 정원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 정원을 자주 찾았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 가는 곳마다 동심은 유혹을 당했다. 산딸기, 능금, 돌배, 돼지감자 등 여러 가지 주전부리감이 나를 반겨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텐데 그때는 왜 그렇게 맛있게 느껴졌던지...
그 당시에는 아이들의 간식거리라고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시골의 구멍 가게는 형편이 없었다. 십 원 짜리 동전을 가지고 구멍가게에 가면 겨우 눈깔사탕이나 라면땅, 아니면 아이스캐키 한 개를 살수 있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아이스케키는 우리 어린이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존재였다. 길쭉하게 생긴 얼음 막대기, 그 속에는 나무 절가락이 꽂혀있고, 색깔은 다양했다. 물론 색소를 넣어 맛있게 보이려고 했겠지만 하여간 그것은 항상 군침을 돌게 했다. 어쩌다가 이 아이스케키 한 개를 얻어먹는 날이면 그 날의 방 청소는 나의 몫이었으니까.
장림으로 이사하기 전 우리는 부산 충무동에서 살았다. 그 때 나는 아이스케키를 물리도록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도 돈을 내지 않고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어찌 행운아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살던 집의 아래층은 아이스케키 공장이었다. 우리는 2층에서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나는 아이스케키 공장의 아저씨를 잘 사귄 덕분에 그 맛 좋은 아이스케키를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물론 그 공장과 같은 건물에 살았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아저씨의 호기심을 사야겠다는 동심 속의 재치와 집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쪼르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나는 출근하는 아저씨를 만나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꺼?\" 라고 하면, 아저씨도 반가운 목소리로, \"오냐, 너도 잘 잤니?\" 라고 대답하며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이스케키 하나만 주세요!\"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대로 참아야 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사만 받고 매정하게 등을 돌리던 아저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던, 그런 날이 한 2주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놈 참 똘똘하고 인사성도 밝구나\" 라고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아저씨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바로 아이스케키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얘, 너 이거 하나 먹어봐라...\" 나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날의 아저씨가 얼마나 멋지고 고마웠던지, 연신 꾸벅거리면서 \"아저씨 고맙습니더\" 만을 연발했다.
그렇게도 눈치 없던 아저씨가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을까... 그 아저씨한테도 나와 같은 아들이 있었을까... 여하간 고마운 일이었다. 그 날 이후 아저씨와 나 사이에는 말없는 묵계가 이루어져, 아침마다 인사의 대가로 아이스케키 한 개씩을 얻어먹는 것이 나의 다시없는 즐거움이었고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환상적인 보물 창고를 버리고 이런 시골중의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때처럼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2년 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재미있는 아이스케키 이야기는 끝나지를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케키는 소풍 갈 때에도 따라 다녔다. 아이스케키 장사 아저씨가 초등학교 소풍날에도 따라와서 수많은 아이들을 웃기고 울렸기 때문이다.
우는 아이들은 그 아저씨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아이들이었다. 아저씨는 꼬마들을 상대로 늘 가위 바위 보의 내기를 걸었다. 만약 이기면 돈을 내지 않고 아이스케키를 먹을 수 있지만, 지면 어김없이 돈을 내야만 했다. 그런데, 제아무리 가위바위보를 잘하는 아이라도 어른을 이겨낼 아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아이들 중에 나도 끼어 있었으니 나는 원래부터 어리석었던 모양이다. 한 번이라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할 도리 없이 판판이 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스케키 공장 아저씨와 이 아이스케키 장사 아저씨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어 보였다. 순진한 아이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코묻은 돈을 노리던 장사꾼 아저씨의 인상은 두고두고 떨떠름한 앙금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이스캐키는 동심의 세계를 넓혀주는 환상적인 존재이다. 아이들은 아직 효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부모가 주는 달콤한 미끼에 의해 곧잘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한다. 나도 가끔 아이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아이스케키를 미끼로 던진다. 집안 청소를 하거나 정리를 할 때 가끔 쓰는 방법인데 퍽 효과적이다.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먹을 욕심에 아빠 엄마의 일을 도와준다.
그들은 단지 먹을 것과 갖고 싶은 것을 자기 손에 넣으면 그뿐이다. 과연 이런 방법이 부모로써 취할 올바른 태도인지를 생각해 본다. 가끔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항상 기브 앤드 태이크(give and take)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서로에게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쌓아 올릴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부모가 아이들에게 조건적으로만 대한다면 그들 역시 부모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린 시절 소풍 때마다 따라 와서 가위바위보로 아이들을 울렸던 그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 아닌가.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스케키의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 아이스케키 하면 속았다는 느낌보다는 그 맛만큼이나 사랑, 신뢰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다.
월간 '순수문학' 200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