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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는 삼하빌딩 앞에 서 있었다. 하늘 높이 솟은 빌딩 앞에서 윤주는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준수를 만나야 했다. 윤주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넓은로비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 다니고 있었다. 윤주는 안내 데스크로 갔다.
“김준수 사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윤주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에게 물었다.
“약속을 잡으셨나요?”
“아뇨. 약속 같은 건 잡지 않았는데요.”
“사장님을 만나시려면 약속을 먼저 잡으셔야 됩니다.”
“저 꼭 만나야 되는데...”
“사장님은 바쁘신 분이에요.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윤주는 난처했다. 그 때 뒤에서 윤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주씨.”
윤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준수였다. 준수는 윤주한테로 걸어왔다.
“여긴 어떻게?”
“저한테 빚 갚으세요.”
“예?”
“저 번에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살려 주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빚 갚으세요. 돈이 필요해요.”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바빠서. 저녁에 만나면 안 될까요? 저 번에 갔던 바 아시죠? 그 곳에 8시까진 갈게요.”
“정말 올 건가요?”
윤주는 미심쩍어 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주씨는 속이지 않아요. 그럼 저녁에 뵙죠.”
준수는 떠났다. 윤주도 일단은 안심을 하며 회사를 나왔다.
윤주는 7시 반에 준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바에 도착했다. 약속시간인 8시가 되어서 준수가 나타났다. 준수는 윤주가 앉아 있는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뭐 드실래요?”
준수가 물었다.
“전 칵테일은 잘 몰라서. 그냥 저 번에 마셨던 거 마실게요.”
준수는 준벅 2잔을 주문했다. 곧 술이 나왔다.
“낮에 하던 얘기를 하죠.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준수가 물었다.
“아가씨가 그러는데 어머니가 위암에 걸리셨대요. 다행히 초기라서 수술만 하면 낫는다고 하던데.”
“돈이 필요했던 거군요. 그래서 저한테 빚을 갚으라고 한 거였군요. 윤주씨 아버님이 날 구해주고 목숨을 잃었으니까. 돈은 마련해 드리죠.”
“예?”
윤주는 놀랐다. 설마 준수가 이렇게 쉽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을 구해 준 사람이 우리 아버지인지도 확실치도 않은데...”
“절 구해 준 사람은 분명 윤주씨 아버님일겁니다. 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윤주씨와 절 만나게 해 준 사람이 윤주씨 아버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돈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빚은 갚아야 하니까.”
“고맙습니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차 가져 왔으니 태워다 드릴게요.”
윤주는 거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 남자한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가씨가 생각났다. 앞에 있는 사람은 아가씨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가씨를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죠.”
윤주는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준수를 따라 나갔다. 준수가 차문을 열자 윤주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는 윤주가 살고 있는 구룡마을로 가고 있었다. 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수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야?”
선화였다.
“집.”
준수는 거짓말을 했다. 선화한테 하는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윤주랑 같이 있다고 할 수가 없었다.
“집? 일찍 들어갔네.”
“응. 쓰고 싶은 소설이 있어서.”
“또 소설이야? 회사일이나 열심히 하라니까. 난 정말 의사 그만 둘거라니까. 그러니까 준수씨가 나 먹여 살려야 한다고.”
“알았어. 근데 무슨 일이야?”
“응. 내일 시간 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할 얘기가 있어서.”
“알았어.”
“그럼 내가 점심 시간에 회사로 갈게.”
“그래.”
선화는 전화를 끊었다.
“아가씨인가요?”
통화가 끝나자 윤주가 물었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한테 잘 해 주세요. 아가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전 아직까지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고 있었을 거에요.”
“예? 그게 무슨 얘기죠?”
“아버지는 사람을 구했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기억해 주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저는 아버지가 그런 일로 죽어서 엄청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고요. 아버지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언젠가 한 번 아가씨한테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했더니 아가씨가 그러더라구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우리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자기도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 아버지처럼 사람을 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면서.”
“선화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그렇게 착한 사람을 속이고 싶진 않은데... 윤주씨에 대한 내 감정을 말하는 거에요. 윤주씨도 더 이상 감정을 속이려고 하지 말아요.”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윤주는 역시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심장이 뛰고 있었다. 준수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윤주가 선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구룡마을에 도착하자 준수는 차를 세웠다. 윤주가 차에서 내렸다.
“돈은 마련해 드릴테니 하루 빨리 수술 날짜를 잡도록 하세요.”
“예. 조심해 들어가세요.”
윤주는 인사를 하고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준수는 U턴을 해서 차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준수는 선화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선화한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날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