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4부. 아무것도 없다.(3) 부제 - to. my dear..
끼이익..
올 여름 장마가 지나간 후 녹이 슬어버린 옥상의 철문은 쉰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젖혀진다. 조금씩 젖혀지는 문틈사이로 파란 하늘이 시야 속으로 들어오고 그와 함께 햇빛이 문틈 사이를 통과해 내 몸에 아로 새겨진다. 잠시 눈부신 시간이 지난 내 시야에 빛으로 향하고 있는 꼬마의 그림자가 보인다. 중학생 정도 되었을까. 꼬마는 아파트 옥상의 난간 앞에서 가지런히 신발을 벗더니,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어 그 신발 아래에 눌려두고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제 위치를 찾는다. 지금의 이 날씨가 구름한점 없이 덤덤하고 고요하기 때문일까. 내눈에 비친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내 위치를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 그 자리에 멍하게 굳어버렸다.
꼬마는 정리된 신발을 뒤로 한 채 난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나는 그에 맞춰 담배를 하나 꺼내 입으로 가져간다. 꼬마의 오른발이 난간위로 올라갈 때 내 오른손이 입에 물려진 담배를 향해 라이터를 향하고 꼬마의 왼발이 마저 올라가 난간위의 아슬아슬한 형태가 되었을때, 나는 담배의 첫숨을 깊게 들이킨다. 꼬마가 잠시 기우뚱하는 순간, 담배 때문일까 나도 일순 머리가 피잉! 하는 느낌과 함께 잠시 기우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꼬마와 나는 다시 바른 자세를 잡게 되었다. 담배와의 두 번째 호흡, 세 번째, 네 번째, 마침내 마지막 호흡과 함께 내 입에 담배가 꽁초가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꼬마는 난간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꼬마의 뒷모습과 함께 상황인식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떠한 상황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현실감있게 다가오고 그 아이의 상황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해야겠지.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다가 순간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이는 지금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과 해방의 자유를 저울질 하고 있다.' 그러한 그에게 다가가 나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남아있는 삶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줘야 하지?"
너의 희망은 결국 그 어떤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사실 단단한 형태를 가진것은 니가 생각하는 희망중에서 드물다. 아니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눈앞에 떨어진 초콜릿 조각을 생각 없이 쫓아가고 순간의 달콤함에 니 몸을 맡기고 생각 없이 손을 뻗어서 그 초콜릿 조각을 쥐어라. 그것은 때론 쓴맛이 날수도 있고 생각보다 큰 조각일 수도 있지만, 그건 지나고 나면 먹었다는 기억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래도 산다는 건..
"원래 그래" 그것이 아이에게 위로가 될까. 사형 선고가 될까.
순간 내 등 뒤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나를 지나 꼬마의 등을 향해 나아간다.
'신이 돕는구나'
너와 나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줄 그의 강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이는 바람이 몸을 스치자마자 몸부림 치다가 옥상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그리고는 이내 고슴도치처럼 몸을 움츠리고선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아니, 흐느낀다고 표현해야 할까. 신의 의도에서 아이가 벗어난 것인지 아니면 저것 자체가 신의 의도인지 알수없지만...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확실한 존재가 되어 떨고있다. 나는 담배갑에서 담배하나를 꺼내 옥상의 입구 앞에 라이터와 함께 가지런히 놓아둔다. 그렇게 놓아두고 돌아서다 말고 다시 한번 라이터와 담배의 위치를 확인한다. 아이가 자신의 편지가 공개되지 못할까 두려워 한것처럼.
계단 통로를 내려오는 내내 파란하늘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파란 하늘 가운데서 그 하늘에 검게 점 찍어둔 아이의 그림자도. 내가 신이였다면 그 아이의 등을 건드리지 않았을텐데. 신은 의외로 짓궂은것 같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다말고 거실을 보았다. 색이 없는 모노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슬프지는 않지만 무언가 나와 동떨어져 있는 비현실적인 모습의 전경, 신발을 마저 벗고 거실로 향해 거실 중앙에 가만히 서보았다. 지금의 나도 그 꼬마처럼 어색한게 아닐까. 이미 오늘 예정된 3번의 샤워중 2번을 했지만, '오늘은 마지막 샤워를 좀 더 빨리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 커튼을 치고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현실감이 사라져 가고 원래 귓가에 맴돌던 소리처럼 익숙해진다. 나는 반쯤 채워진 욕조에 몸을 담구어 누워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현실감이 사라졌다. 이내 내게 남아있던 고민과 앞으로의 고민이 나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을 것임에도 왠일인지 그것에서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팔을 뻗어 욕조 머릿쪽 선반위에 놓아둔 수면제통을 집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20여알 정도 입에 털어 넣은 후 가만히 호흡을 골라본다. 내가 의미 있어 하는 호흡의 수는 점점 더 줄어가고 내게 주어졌던 시간과 내게 주어질 시간의 중간에 있는 나인데 앞과 뒤에 있을 시간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기분을 느낀다. 고를수 있는 호흡의 수가 점점 줄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감는다.
쏴아아아아아아...... 나없이 소리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