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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와 선화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신문에 실렸다. 두 사람의 부모님의 지위가 지위인지라 둘은 매스컴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문을 본 사람들 중에는 결국 또 정경 유착이군 하며 자조섞인 말을 내 뱉는 사람도 있었다.
햇볕이 한층 수그러진 초저녁이었다. 준수는 쇼핑몰 7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신문사 기자인 친구 효석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축하해. 너도 드디어 결혼을 하는 구나.”
“고마워.”
“도대체 삼선 국회의원 외동 따님은 어떤 여자야?”
“잘 알 거 아냐? 기자니까.”
“삼선 국희의원인 박 의원이나 알지. 딸까지 자세히 알 리가 있나? 의사라는 것 정도 말고는 아무 것도 몰라.”
“착한 사람이야. 난 행운아인 거지.”
준수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며칠 전에 만난 윤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살리고 죽은 사람이 윤주의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자꾸 들수록 윤주한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효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효석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뭐? 알았어. 금방 갈게.”
“무슨 일이야?”
“가 봐야 할 거 같아. 아내가 애를 낳을 거 같다는 군. 출산 예정일은 한 달이나 남았는데. 먼저 일어날게”
효석이 일어났다.
“같이 가지. 나도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하니까.”
준수는 저녁을 선화와 함께 선화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과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었다.
두 친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1층 정문으로 나온 후에 효석은 택시를 잡아 떠났다. 준수는 차를 세워 둔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나오는 윤주와 마주쳤다. 준수는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윤주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어떻게?”
준수가 물었다.
“내일이 어머니 생신이라서 어머니 생신 선물 사느라고. 선생님은 여기에 어쩐 일로?”
“친구 좀 만났어요. 잠깐 우리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윤주는 준수를 따라 가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 때 아가씨 생각이 났다.
“돌아갈래요. 선생님 하고는 할 얘기 없어요.”
“제가 꼭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잠깐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준수는 윤주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윤주는 준수의 손을 뿌리칠려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주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윤주의 마음은 준수한테로 가고 있었다.
준수와 윤주는 바 안으로 들어갔다. 바 안에는 푸른 조명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 앞으로 가서 앉았다. 준수는 준 벅 두 잔을 주문했다. 시간은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선화와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바텐더가 준벅 두 잔을 내왔다. 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수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지금. 오늘 신부님하고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약속은 못 지킬 거 같아. 다음으로 미루자.”
준수는 선화와 사귄 후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럼 미리 전화라도 하지.”
“미안.”
“결혼식은 성당에서 올리는 것에 대해 이의 없지?”
“응.”
“그럼 끊을게.”
“응.”
선화가 전화를 끊자 준수는 핸드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아가씨인가요?”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러면 안 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가씨를 속이는 일은...”
“그 때 윤주씨 아버지가 구해줬다는 사람...”
준수는 윤주의 말을 잘랐다.
“저 일지도 몰라요.”
“예?”
윤주가 놀란 눈으로 준수를 보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항상 말씀하셨어요. 널 살려준 사람의 마음을 잊지 말라고. 난 하도 어렸을 때여서 기억도 하나도 안 나지만.”
“그럼 우리 아버지인 게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사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고 해도 선생님은 이러시면 안 되요. 선생님과 아가씨가 결혼하는 건 신문에도 다 보도되었잖아요.”
“나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요. 하지만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 그 사람이 윤주씨 아버지라면 윤주씨 아버지가 날 윤주씨랑 만나게 해 준 게 아닌가 하는...”
“바보 같은 억측이에요.”
윤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더 있다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준수의 품에 안겨 사랑한다는 고백이라도 할 것 같았다. 아가씨한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윤주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바를 나왔다.
명동성당 앞에는 신부복을 입은 김 신부와 흰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은 선화가 서 있었다. 선화의 목에는 선화가 중학교 졸업을 할 때 김 신부가 졸업선물로 사 준 금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선화가 통화를 마치자 김 신부가 물었다.
“지금 어디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대요. 신부님, 오늘은 그냥 저희 둘이 먹어요. 제가 살게요.”
“내가 사야지.”
“그럼 더치페이.”
선화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선화와 김 선부는 성당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선화는 잡채밥을 김 신부는 고추덮밥을 주문했다. 조금 있자 두 사람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둘은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곧 결혼이구나. 결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결혼은 정말 성당에서 할 거니?”
“예. 준수씨도 찬성했거든요. 예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주례는 신부님이 서 주셔야 해요?”
“약속?”
“잊어버리셨어요? 제가 중학교 졸업하는 날 신부님이 저한테 이 금십자가 목걸이 주면서 말했잖아요. 니가 커서 결혼하는 날에는 내가 주례를 서 주겠다고.”
김 신부는 선화의 말에 그 때 확실히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선화가 그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을 여태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신부님인걸요. 약속 지키셔야 해요.”
“그래. 성직자가 되서 약속을 안 지킬 수는 없지.”
저녁을 다 먹고 두 사람은 더치 페이로 계산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어 있었다.
“다음엔 꼭 준수씨 데려올게요.”
“응. 너 결혼하기 전에 셋이 한 번 밥이라도 같이 먹자.”
“예.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화는 김 신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차를 세워 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