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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어머니 생신이었다. 윤주는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윤주는 어머니의 생신인데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위암에 걸린 것을 모르고 계셨다. 윤주가 어머니가 위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선화 덕택이었다. 윤주의 초대로 윤주의 집에 들렀던 선화는 윤주 어머니의 몸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서 선화한테 검사를 한 번 해 보자고 했고 윤주 어머니가 위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윤주는 어머니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초기여서 선화는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으나 윤주한텐 돈이 없었다.
“왜 그러니? 밥 안 먹고? 무슨 걱정 있니?”
“아니에요. 생신 축하 드려요. 어머니.”
윤주는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애써 떨쳐내며 말했다.
선화는 일을 끝마치고 병원을 나오려다가 문 앞에서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는 손에 예쁘게 포장을 한 한우 선물세트를 들고 있었는데 선화를 보자마자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 퇴근하시나 봐요?”
“예.”
선화도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선화는 할머니 손주의 수술을 집도 했었다.
“선생님 덕에 손주 녀석이 다시 살아났어요. 이거 변변치 못한 선물이지만 받아 주세요.”
“저 죄송하지만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전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
한 원장의 목소리였다. 선화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원장이 두 사람한테로 왔다.
“고맙다는 인사로 주는 선물인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할머니는 한 원장한테 한우 선물 세트를 기쁘게 건네주었고 다시 한 번 두 사람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결혼하면 정말로 병원을 그만 둘 생각이야?”
“예.”
“난 박 선생이 계속 일해 줬으면 하는데.”
“결심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전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가야 할 데가 있어서요.”
선화는 한 원장한테 인사를 하고는 병원을 나왔다.
윤주와 윤주 어머니는 TV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누구지?’ 윤주는 의아해 하며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는 선화가 손에 케잌을 들고 서 있었다.
“아가씨.”
“어머님 생신이시잖아?”
윤주는 허리를 숙여 낮은 대문을 통과해서 들어왔다.
선화와 윤주는 방문인 미닫이문을 열었다. 윤주 어머니는 선화가 온 것을 보고는 무척 놀랐다.
“선생님,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아주머니 생신이시잖아요? 케잌 사 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선생님이 검사 한 번 받아 보자고 해서. 윤주만 마음 고생하게 했어요.”
“정말 그렇네요.”
윤주와 선화는 방에 앉았다. 세 사람은 8평짜리 좁은 방에서 선화가 가지고 온 케익을 먹으며 연속극을 보았다. 연속극이 끝난 후 선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머니, 저 그만 가 볼게요.”
“예.”
윤주가 선화를 바래다 주기 위해 집 앞까지 나왔다. 날이 많이 어두워져 있어 길가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어떡할 거야?”
선화가 물었다.
“예?”
“어머니 수술.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손도 쓸 수 없게 돼.”
“돈이 많이 들겠죠?”
윤주는 얘기를 해 놓고도 그런 당연한 얘기를 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응, 나도 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아서.”
“아가씨, 그러지 마세요. 더 이상 아가씨한테 손을 벌릴 수는 없어요. 저도 양심이란 건 있는 인간이라고요. 아가씨 아니었으면 손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어머니 병을 알았을 텐데... 제가 어떻게든 해 볼 게요.”
그 때 윤주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준수였다.
“그럼 그만 갈게.”
“예. 들어가세요.”
선화는 윤주의 집 앞에 있는 전봇대에 세워 둔 차를 타고 떠났다. 윤주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가셨니?”
“예.”
“난 부자들은 다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선생님을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 세상에는 깨끗한 부자도 있다고. 선생님이 너한테도 잘 해 주지?”
“그럼요.”
“선생님한테 잘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의 은혜를 저 버려서는 안 돼.”
“예.”
윤주는 대답을 하면서 준수를 떠올렸다. 지금 어머니의 수술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윤주한테 빚이 있다고 말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