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피리 2
홍시현 실장은 김이 뿌옇게 서린 장미찻잔을 들고 가만히 내음을 음미했다.
"꽤 반응이 좋았어. 사실 그동안의 작품들보단 좀 더 원숙미가 풍겼다고나 할까... 특히 마지막 장면,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고 그저 전화하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여주인공말야."
"이 모티브로 중편, 장편까지 쓰라는 제안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그녀가 나직히 대답했다. 정말 상상도 하지않았다. 내 기억속의 유를 토해내고 싶다는 충동일 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소설에 동감했고, 감정을 이입했다. 유, 나는 너에게 고마워해야하는거니. 그녀는 카라멜 시럽을 듬뿍 넣은 마끼아또를 천천히 스푼으로 휘저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살을 덧붙여보도록 하렴."
홍 실장이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더니, 일어나야겠다,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속있니?"
"응.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 사실 정신이 없긴 해."
홍 실장은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 대학시절 멘토가 되어주던 선배와 자연히 연애로 발전했고, 얼마전 상견례를 마친 뒤 내년 봄 결혼날짜를 잡았다. 한창 바쁠때다. 게다가 홍 실장의 차근차근한 업무 진행으로 출판사에서도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 상황.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홍 실장같은 유능한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다. 덕분에 신혼 여행가서까지 교정지 보고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며 피식 웃는 홍 실장이지만, 막상 결혼하고 신혼 여행을 가서도 자신의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여자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여유있게 써 봐. 이번 작품은 꽤 좋은걸. 너에게도 뭔가 나른함이 풍겨져. 소설에서처럼 말야. 홍 실장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돌아섰다.
얼마쯤 걸어가다 돌아봤을때 홍 실장의 차는 이미 신호대기를 받고 서있는 차들의 대열 사이로 들어서 있었다.
. . .
하얀 화면의 마우스 커서가 한없이 깜박이고 있다. 깜박, 깜박, 깜박,
그녀는 한참동안 화면을 들여다 봤지만 무엇이라 적어낼 말이 없다.
야옹, 거리며 그녀의 점박이 고양이가 의자옆으로 살랑살랑 걸어왔다. 고양이, 매력적인 동물이다. 누가 그랬던가. 개는 키우는 느낌이지만 고양이는 동거하는 느낌이라고. 기분이 내킬때만 그녀에게 애교를 피운다. 하지만 스스로 귀찮아할때는 그녀가 머리를 갉아줘도 그저 나른한 표정이다. 지금은 놀고싶은거니? 그녀의 시선에 고양이는 눈을 빤히 맞추고 한번 더 운다. 야옹.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않는다.
유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얄미워, 개와는 달라. 유는 제멋대로인 고양이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노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유는 개보다는 고양이다. 자신의 기분이 내킬때에만 그녀에게 다가왔다. 살랑살랑, 그녀에게 미소를 던져주고, 또다시 사라졌다. 그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산책을 나간 고양이를 기다리듯이,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고양이의 산책은 길고 길었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다. 다른 고양이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때면, 마치 그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무일 없었다는 것 처럼 고양이는 다시 그녀의 곁에서 야옹, 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와 고양이는 그랬다. 그녀가 정신이 없을때, 다른 누군가가 옆에서 그녀를 다독일때, 유는 그녀의 인생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쓸쓸함을 느끼게 될 때쯤 전화벨이 울리고,
잘 지내지? 하는 나직한 목소리, 너는 타이밍을 정말 잘 맞추는 것 같아. 그녀는 그런 유의 등장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곤 했다.
야옹, 고양이가 나지막히 울면서 그녀의 발치를 맴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를 긁어준다. 기분이 좋은지 조그맣게 가르릉대며 고양이는 가만히 앉아있다. 고양이의 목에서 퍼지는 조그만 진동을 그녀는 좋아한다.
그러나 한번도 유는 그녀에게 '있어본' 적이 없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그것이 유와 고양이의 다른점이다.
고양이는 그녀가 머리를 긁어주면 만족해하지만,
유는,
그녀에게서 어떠한 감정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 . .
화분을 샀다.
"곧 꽃이 필거예요.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마세요."
꽃집 아주머니의 친절한 당부와 함께 그녀는 화분을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며칠째 시선을 떼지못하고있다가 오늘, 마음을 먹고 사온 화분 하나. 그녀는 식물을 키우는 데는 재주가 없다.
물을 자주 주지않아도 되는, 가만 놔두어도 잘 자라는 선인장조차 그녀는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말려 죽이곤 했다.
그런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수선화 구근이 가득한 타원형의 화분. 초록색의 이끼가 주변에 가득 깔려있다.
구근에게서 곧게 뻗어나온 초록색 이파리. 그리고 꽃이 필 가느다란 연둣빛 꽃대. 세게 힘을 주어 꺾으면 "끊어질" 듯한 꽃대.
가만히 손을 대어 본다. 연하게 빛나는 꽃대가 아름답다. 세차게 뻗어있는, 쭉 곧은 대가 아름답다.
컴퓨터 책상의 윗선반에 화분을 얹어두고, 그녀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타타닥. 조용한 방에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고양이는 어디론가 산책을 나갔는지 보이지않는다.
그녀는 문득 리모컨을 들고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은은하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몽롱한 하프소리와 부드러운 플룻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모짜르트의 플룻과 하프를 위한 협주곡, 2악장이다.
그녀는 이 협주곡을 좋아한다. 부드럽다, 다정하다. 그녀는 이 곡을 들을때마다 언제나 그렇게 느낀다.
그녀는 플룻의 선율을 좋아한다. 플룻 뿐만이 아닌, 오보에의 가느다랗고 힘찬 소리도, 클라리넷의 둥글고 포근한 소리도 좋아한다. 하지만 플룻은 뭔가 매력이 있다. 높은곳에서 가만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어느순간 옆에와서 맴돈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듯 한 소리지만 결코 잡히지않는 소리다.
유가 플룻을 부는 모습을 그녀는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주 오래전, 들은 듯 하기도 하다. 그때의 연주도, 연주를 할 때의 유의 모습도,
하나도 기억나지않는다. 하지만 하나. 뭔가 조합이 어울린다는 느낌. 아, 이 아이에게서 이 음색은 정말 자연스러운 거구나. 그것이 그녀가 가진 느낌이었다. 플룻, 은빛이 아름답다. 차갑게 번뜩이면서도 은은하게 빛난다. 아름다운 악기다.
플룻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폐활량이 약한 그녀에게 관악기란 힘들기만 했다. 어린시절, 리코더를 불 때도 그랬다.
곧잘 불곤 했지만, 언제나 숨 조절에서 힘들어하기 일쑤였고, 더더군다나 시험때엔 덜덜 떠는 탓에 숨 조절이 더 힘들기도 했다.
불다가 긴장하여, 숨이 막히는 탓에 중간에서 그만 두어 버린 적도 여러번 있었으니.
부드러운 화음이 방 안을 가득 맴돌고, 그녀는 다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얗기만 했던 화면에 까만 글자들이 가득 생겨난다. 생겨났다가 사라졌다가, 또다시 화면 가득 생겨난다.
소설이란 또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작업이다.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낼 수있다. 매력이 있다. 그 곳에서 많은 인물들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여러 커플들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리고 가슴아픈 이별도 경험하곤 한다.
하얀 화면속에서 그녀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