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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와 선화는 평창동에 도착했다. 거대한 성 같은 집 앞에서 선화가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환상적이었다. 곱게 깔린 잔디위에 예술미가 한껏 풍기는 조각상들이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현관에 다다르자 선화가 현관문을 열었다. 최고급 목재들이 가득한 넓은 거실에선 가정부인 윤주가 거실 중앙에 놓인 탁자를 닦고 있었다. 윤주는 선화보다 다섯 살이 어렸다.
“부모님은?”
“잠깐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거에요. 아가씨가 말하신 분인가요?”
“응.”
“안녕하세요.”
윤주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준수는 윤주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인데도 윤주의 얼굴은 빛이 났다.
“안녕하세요.”
“윤주는 처음이지? 우리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지만 내 요리 선생님이기도 해.”
“응?”
“저 번에 놀이 공원에 갔을 때 내가 싸 간 유부초밥 맛있다고 했잖아? 그거 윤주한테 배운 거야. 근데 진짜 이쁘지?”
준수는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정말 샘 난다니까. 얼굴도 이쁘고 요리도 잘 하고. 너 그렇다고 딴 마음 먹으면 안 돼. 자고로 예로부터 조상들이 남자는 믿을 만한 동물이 못 된다고 누누이 말해 왔거든.”
“아가씨, 농담이 지나쳐요.”
“괜찮아요. 한 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니니까요. 근데 정말 미인이시네요.”
확실히 윤주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하지만 준수가 윤주한테 저도 모르게 끌리는 것은 윤주가 미인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준수는 윤주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을 강렬히 받았다.
“앉아 계셔요. 차라도 내 올게요.”
윤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자리를 피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다. 그런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윤주의 뛰는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준수와 선화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반했지? 그래도 바람 피면 용서 안해.”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언제 철들래?”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니까. 난 정말 언제 철들까?”
준수는 할 말을 잃고는 빤히 선화를 쳐다보았다.
선화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준수의 시선을 느끼고는 말했다.
“역시, 그래도 내 얼굴도 봐 줄만은 하지?”
“전혀.”
윤주가 쟁반에 차를 내왔다.
“아가씨가 쟈스민차를 좋아해서 쟈스민차를 탔는데 괜찮죠?”
“예. 저도 쟈스민차 좋아해요.”
초인종이 울렸다.
“의원님하고 사모님 오셨나 봐요.”
윤주는 인터폰으로 확인을 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박 의원과 부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와 있었구나.”
박 의원이 준수와 선화를 보고는 말했다.
“전 저녁 준비할게요.”
윤주가 말했다.
“도와줄게.”
선화는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윤주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수는 선화와 선화의 부모님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후에 선화의 집을 나왔다. 윤주는 일을 끝마치고 돌아간 시간이었다.
“정말 결혼하면 일 그만 둘 거야?”
준수가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선화한테 물었다.
“응, 너랑 어머님 건강에만 신경 쓸려고. 넌 아버님도 안 계시잖아?”
“하지만 엄청 공부해서 된 의사잖아? 그걸 포기한다는 건...”
“괜찮아. 그만 들어가 봐. 어머님 걱정하시겠다.”
“응.”
준수는 차에 올라탔다.
밤의 네온싸인이 번쩍이고 있었다. 인도쪽 차도로 붙어 달리던 준수는 버스 정류장에서 윤주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준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차를 세우고는 창문을 내렸다.
“타세요. 집까지 태워줄게요.”
윤주는 망설였다. 타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저녁식사를 하면서 듣게 된 얘기 중에 준수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윤주는 차에 올라탔다.
“집이 어디에요?”
“구룡마을이에요. 아세요? 어딘지?”
“아뇨.”
“강남에 있어요. 우선 도곡역으로 가 주세요. 거기 도착하면 길을 가르쳐 드릴게요.”
준수는 다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전 아가씨가 의사를 그만두는 거 반대해요.”
“예?”
“병원 원장님도 아가씨를 얼마나 칭찬하는데요. 아가씨가 살려준 사람들한테서도 고맙다는 편지와 선물이 많이 온다고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병원을 그만두는 건 막아주셨으면 해요. 그건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라고요.”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해봤자... 저도 솔직히 선화가 병원을 그만두는 것은 반대에요... 하지만 선화는 이미 결정을 한 것 같아서... 선화는 의외로 고집이 세요.”
“그래요. 아가씨는 고집이 세죠.”
준수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준수가 윤주를 태워 주려 한 것은 자신의 감정에 진 결과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메아리가 자꾸 울렸다. 선화는 괜찮은 여자였고 선화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준수는 도곡역에 도착한부터 윤주가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윤주가 가리키는 대로 따라 가다 보니 구룡마을이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구룡마을이라는 곳은 판자촌이었다. 서울의 강남에 이런 판자촌이 있으리라고는 준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주가 어떡하다 이런 곳에 살게 됐는지 준수는 자못 궁금해졌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예? 예.”
“어떡하다 이런 곳에 살게 된 거에요?”
“아버지 때문이에요.”
“예?”
“제가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계곡에 빠진 아이를 구해내고 계곡물에 휩쓸려 가 죽었어요. 전 아기였으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머니 말로는 그 일로 회복되어 가던 아버지 회사는 부도를 맞아 망해 버리고 결국 빚에 쫓기던 어머니는 갈 곳이 없어 저를 데리고 이 곳으로 들어왔대요.”
준수는 충격 속에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가 말했던 그 때 자신을 구했던 남자가 지금 옆에 있는 윤주의 아버지란 말인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준수는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전 그만 내릴게요. 그리고 아가씨한테 잘해 주세요. 아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윤주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하지만 준수는 윤주가 내리는 것도 모른 채 계속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 보는 윤주한테서 어디선가 본 거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그 일 때문이었던 건가? 준수의 머릿속에는 처음으로 그 때 자신을 구해 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