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이제 청년이 되었다.
덕쇠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 듬직한 농군이 되었다.
시간의 강줄기에 몸을 맡기고, 유유히 흘러온 세월을 역류해 올라가는 청년의 유년의 기억속에는
소녀가 있었고, 호두서리로 된고생을 하면서 우정을쌓아온 친구 덕쇠가 있었다.
덕쇠도 징검다리를 건너려는 청년을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소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려던 건
아마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둠을 틈타 호두밭으로 잠입해 들어오는 어린 밤손님(?)들이 반가운 것인지 모른다.
"왜이리 늦었니~ 손 대강 씻고 얼른 마루로 올라오니라"
덕쇠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오는 동안, 농사일 마무리 짓고 오신 아버지께서 이미 닭 한마리를 잡으셨나 보다.
아주 어렸을적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아침이고 점심, 저녁, 식사시간 외에도 음식을 먹을때는 항상 이 평상(床) 사용되었다.
적갈새풍의 니스칠이 되어있고, 전반적으로 상 가운데에 봉황이 그려져 있는 상.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우리집안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그 상은 이제 모서리부분 살갖이 벗겨져 있고, 봉황의 화려한 날개와 다리부분의
한쪽도 희미하게 지워져 간다.
그 상 한가운데 김이 모락모락한 백숙 한마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에미가 되어갖고, 서울서 고생하는 아들하나 있는거 뻔히 알면서도 따순 밥 한번 챙겨 먹이지도 못한게 한참 걸리더니마는.... 많이 먹어라"
닭다리 하나를 주욱 찢어서 청년의 손에 일부러 쥐어 주신다.
그리고 다른 다리 하나까지도 찢어서는 아들 앞으로 살짝 밀어 놓으시는 어머니.
괜스레 청년은 아버지 눈치를 한번 볼 수 밖에 없다.
말없이 숟가락으로 물김치를 떠서 입을 축이시는 아버지.
"어머니도 좀 드세요"
"내 걱정 말고 어여 많이 먹어라"
먹기 좋게 닭뼈를 발라내서 살코기만 한쪽으로 추려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청년은 순간 모르게 치올라오는 그 무엇인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야~ 왜그러냐? 사레 걸렸니? 물하고 천천히 먹어라"
얼른 대접에 물을 따라서 아들에게 건네시는 어머니....
항상 그러셨다.
어머니!
당신에게 주어진 어머니라는.... 아내라는.... 여자라는 직함은
한층 빛을 잃어 노을지는 석양의 언덕, 길게 늘어져 뗄레야 뗄 수도 없는 희미하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빛으로 물들어 어떤것은붉고, 또 어떤것은 푸르고. 알록거리고 싱그러운 색채가 화려하게 수 놓을때
그 반대쪽 소리없는 침묵으로 가지를 드리우는건 단지 거뭏스럽기만 한 그림자 뿐이다.
그 마져도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느때고 빛에 의지해야만 그림자는 그림자가 된다.
어머니에게 나는....
어머니에게 나는....빛이 될 수 있을까?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빛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