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글을 시작하려 할때엔... 적절한 말을 찾지못해 몇날 며칠을 고심하곤 한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과 문장이 헤엄쳐 다니는 듯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하면 물고기마냥 요리조리 도망쳐버리곤 하는...
이렇게 글을 시작하고 써내려가다가도 늘상 그랬던 것처럼
여러번 썼다가 지웠다가, 얼마 지나지않아 글씨들로
가득한 종이를 뒤집어 덮어버릴테지,
그녀는 펜을 들고 사각사각 글을 써내려가면서 생각했다.
. . .
커피한잔으로 시작하는 아침은 언제나 나른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원두를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간단한 작업을 겨우겨우 치러낸 다음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디민다.
갓 갈아낸 커피 내음이 방안을 가득 채우면, 그녀는 나른하게 가라앉아가고
있는 몸을 이영차, 움직이곤 했다.
우유를 붓고, 설탕은 두 스푼. 커피가 그녀의 나른함에 조금이라도 탄력을
주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영 푸석하기만 하다.
그녀는 아무리 피곤해도, 단번에 푹 잠들지 못하고 늘 이리저리 뒤척대다가 겨우 잠이
들곤 하는 사람이다. 겨우겨우 잠이 들었나 싶더라도, 문이 삐걱댄다거나 창문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도 반짝 절로 깨버릴 정도로 옅은 잠을 자곤 한다.
동트지 않은 풋새벽에도 깜짝 깨고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는, 결국 늦은 아침잠을
자곤 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언제나 아침의 느낌은 묵직하기만 하다.
입 안이 데지 않게 뜨거운 커피를 홀짝여가며 그녀는 자신의 필체가 군데군데 가득한
노트를 편다. 오후 느지막히 여유 출판사 홍시현 실장과의 전화, 그리고 일러스트 화가인 박민선씨와의
점심 미팅.
그녀는 소설가다.
그녀는 소설가다. 소설을 쓰지만, 특별히 다작을 하고, 나오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는 그런 인기 작가는 아니다. 몇가지의 단편이 문학집에 실리고,
서너편의 중장편을 써내기도 했었다. 얼마 전 발표한 단편 소설 하나가 꽤 좋은 평을
얻어, 이번에 출판사 측에서 그 단편을 모티브로 한 중편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기에 오늘 홍 실장과 그 건으로 미팅을 하게 된 것이다.
홍 실장은 그녀의 담당자이자 중학교 동창이다.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두 사람이었고,
그녀가 소설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 것도 홍 실장이 여러모로 도움을 준 덕이었다.
학창시절때부터 생각이 깊고 신중한 성격의 홍 실장은 그녀의 문체에 많은 영향과
조언을 주었고, 또한 그녀의 작품에 여러번 교정을 해주거나 모티브를 던져주기도 했다.
이번 작품 또한 홍 실장의 도움이 크기도 했다.
그녀가 커피잔을 마악 입에서 떼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전화벨이 울렸다.
박민선씨였다.
"이번에 한식이 꽤 괜찮은 집을 찾아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고무공같은 탄력을 지니고있다.
그녀의 첫 단편을 읽고 일러스트를 자청했노라는 민선씨는 젊은 나이에도
일러스트 계에서는 유명한 실력파이다. 그녀의 일러스트는 단정하면서도 포근함이 느껴졌고
다정하면서도 발랄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민선씨의 일러스트를 곁들인 자신의 단편을
새로이 읽어보았고 그녀 또한 민선씨의 일러스트에 푹 빠지게 되었다.
민선씨의 일러스트로 인해 그녀의 소설이, "옆장에 그려진 자그마한 그림" 하나로 전혀
다른 색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듯 했다. 그 전에는 그저 밋밋하고 단조로운 멜로디였다고 하면
빈 공간에 색색의 그림이 들어감으로 인해 풍요로운 하모니로 흐르고 있다고 할까.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항상 머리를 저녁에 감고 자는 터라 다음날 일어나보면 약간 굽어 있는 때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그녀의 머리는 약간 층이 져 있지만 몇번 손으로 빗어내리기만 한다.
너무 심하게 구부러져 버리면 머리를 묶고 나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묶을 정도까지는 아닌가보다.
창 너머로 하늘을 본다. 구름이 껴 있긴 하지만 우산을 챙길 날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느정도 식어버린, 그리고 잔 바닥에 약간 깔려있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 . .
민선씨는 환하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점심을 들면서 그녀는 내내 웃고 떠들고, 반찬에 대해 평을 내리고 찌개 맛에 대한 소감을
줄줄 얘기하곤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
민선씨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경쾌하고 명랑한
목소리. 항상 입가에 나즈막히 걸려있는 옅은 미소. 그러면서 눈가에서 빛나고 있는 장난스러움.
하지만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엔 또 달라진다.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뀌고
통통 튀는 목소리 속에서도 묵직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주장하고, 세세한 부분도 하나하나 지적하기에 이른다. 자기관리가 뚜렷하고 완벽성을 추구하는 성격.
민선씨는 그녀가 이번에 쓸 중편의 모티브, 앞서 썼던 단편 "은빛 피리"에 대한 생각을 얘기하고 삽화에 대해 설명하며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민선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녀는, 왠지 그녀가 얘기를 하면 내 작품이 아닌 다른 3자의 작품얘기를 듣는 느낌이야,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민선씨가 가져온 삽화 목록을 넘겨보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던 찰나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한 그림이 있었다.
"이거..."
"아, 그건 "은빛 피리"를 읽자마자 바로 그려본 그림이예요. 첫 페이지에 넣으면 어떨까 했는데
좀 밋밋한가 싶어서 밑그림만 그리고 색은 안입혔구요"
그녀가 가리킨 그림은, 아주 희미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마치 플룻을 부는 마냥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주 옅은색 연필로 그린 스케치였다. 아무도 없는 홀이 배경이었고, 남자의 모습은 그리 크지는않았지만 정 중앙에 그려져있었다. 색을 입히지 않은 연필의 밑그림이었다.
"마음에 드네요."
"하하, 그래요? 그럼 이런 식으로 그려보는게 좋을거 같네요, 이번엔. 어머, 마음에 드시면
이 그림 드릴까요?"
"아, 그래도 괜찮아요?"
"네. 그냥 밑그림삼아 그렸는걸요 뭐. 이런 식으로 스케치해둔게 또 있으니까, 이 그림은
그럼 드릴게요."
그녀가 그 그림에 시선을 떼지 못하자 민선씨가 선선히 종이를 빼내 그녀에게 건넸다.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그야말로 희미한 형체에 불과한 남자는 플룻으로 보이는
기다란 막대를 얼굴에 대고 있었고, 연주를 하는 듯 팔을 들어올려 굽히고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는 땅을 딛고, 나머지 한쪽 다리는 의자에 살짝 굽힌 채 올려놓고
있었다. 얼굴형만 동그랗게 그려졌고, 눈도 코도 입도 그리지않은 스케치에 불과했지만
뭔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흡인력이 있는 그림이었다.
"맘에 드시니 다행인걸요. 아직 완성된 그림은 아니지만.."
"느낌이 좋은걸요."
민선씨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 온 그녀는, 그녀가 자주 앉는 의자 옆 벽에 스케치를 붙였다.
마치 꼭, 유 같은 느낌을 주네,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 그럴까. 그래서 이런 그림이 나온걸까.
그녀는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혼자 열심히 곱씹기만 했다.
어떤때는 아직 어려, 하며 피식 웃음이 나오게 했던 유, 하지만 한순간은 나보다 어른이구나 싶을 정도로 말을 하곤 했던 유, 그녀가 알던 사람들 중에선 글씨가 가장 예뻤던 유, 나직한 목소리의 유,
하고자 하는 일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게끔 했던 유,
어떤때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던 유.
하지만 결국엔 모든게, 그녀가 잘못 생각함을 느끼게도 했던 유.
"은빛 피리"를 쓸 때... 그녀는 많이 고민하곤 했다. 가슴속 한켠에 묻었다고 생각한 유.
갑자기 유를 모티브로 무언가를 쓰고 싶었던 생각에 손이 근질거렸던 그때. 그래서 써내려간 "은빛 피리". 유, 너는 그 소설을 읽었을까. 네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걸 너는 알까. 그녀는 괜시리 궁금해졌다.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유를 모티브로 무언가 써내려가고싶었었는지.
나는 너를 한켠에 묻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나지막히 그림속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젠 엇갈릴 일 따윈 없을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묻기만 해서는 안되는 거였을까,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토해내고 싶었던걸까, 그래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아무리 질문해봐도 그림속의 남자는 여전히 연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