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술에 취해도 남자 손에는 가지 않는 여자다.
지나칠 정도로 지나친,
폭음과 과음으로 인해,
다음날 드문드문 기억으로 깨어난 아침.
슬슬 풀려가는 기억에 화들짝 놀라 얼굴이 발갛게 물들지언정,
절대 남자 손에는 어디든 가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날만큼은 왜 그랬을까.
"같이 택시 타고 가자."
그 여자, 어쩐 일인지 순순히 따르기로 한다.
택시 안,
술에 취해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을 건다.
"내 어깨에 편히 기대서 가도 돼."
여자, 처음 보는 남자의 어깨에 기다렸다는 듯 기대며 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여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남자,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그 여자, 이 남자의 입술이 의외로 부드럽다고 생각한다.
토요일 오후 7시.
종로3가는 사람들 발 디딜틈 없이 북적댄다.
직립보행을 하지 못하는 여자가 남자의 품에 폭 안겨서 가는 꼴이 어쩐지 마땅치가 않다.
그 모습을 보며 부러우면 지는거라고 생각한다.
약속장소는 유명하기로 소문난 보쌈집이었다.
사실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다.
몇몇이 이미 도착해서 보쌈, 감자탕과 함께 소주 4병째를 비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여자, 앉아있는 사람들의 등을 스치며 어색하게 인사하고 친구와 함께 앉는다.
원래, 다른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던 날이었다.
그러나, 술이 마시고 싶다며 모임에 나가자는 친구에 말에,
차라리 그럴까 싶었다.
이 모임에 나오면서 여자는 늘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침까지 과음을 하고 노래방을 가고.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고 나면 여자는 뭔가 해소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참동안이나 무료한 삶에 지쳐있던 여자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보니 화장실 문 앞이라 어쩐지 서로에게 불편할 것 같다는,
어떤 처음 보는 여자의 말에 낯선 남자의 옆에 앉게 되었다.
그 남자다.
우연히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말은 놓지 못한다.
어색하다.
한 잔, 두 잔 늘어가는 술 속에 얼굴은 볼터치를 한 것처럼 발그레해진다.
몇 주 전, 술을 먹고 요란을 떤 것을 계기로, 사실, 당분간 금주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여자다.
하지만,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듯이 그 여자와 금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곧 봉인해제 된 것처럼 그 여자와 술이 만났다.
보쌈집에서 나와 2차 장소로 이동했다.
정작 앉아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일어서니 그 남자 키가 굉장히 크다는 걸 알았다.
키가 194cm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여자, 2차에서의 기억부터 사실 드문드문하다.
한때 이 모임에서 연상의 여인과 안 좋은 소문이 돌았던 그 남자다.
안타까운 건, 그 연상의 여인과 그 여자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이다.
연상의 여인이 단순히 오해한 거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그 남자의 모습이 탐탁치 않다.
어쩄거나 좋지 못한 소문이다.
그리고 3차.
가는 길에 언뜻 넘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친구가 일으켜줬던 생각이 번뜩 떠오르자,
그 여자, 또 넘어졌군, 하며 한숨을 쉰다.
3차에서의 기억 역시 많이 없다.
얼마 전 결혼 한 부부가 와서 그 여자가 와이프되는 사람을 참 마음에 들어했다는 기억 정도다.
그리고 기억의 상실.
언뜻 사람들이 택시를 타는 모습이 기억나는 듯도 하다.
그리고 그 남자의 말.
"같이 택시 타고 가자."
그 남자의 집은 방배동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집은 잠실동이다.
비슷한 듯 해도 다른 방향이다.
왜 같이 타고 가자 했을까.
그 여자, 아무리 술에 취해도 남자 손에는 가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그 여자, 그 남자에게 별다른 호감은 없었다.
처음 1차 자리에서 옆에 앉았을 때,
피부는 좀 별로네 싶다가도,
옆 사람과 말하며 우연히 얼굴을 봤는데 쌍꺼풀있는 눈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키가 참 크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에게 그 남자의 인상은 그게 다였다.
그런데 왜?
여자와 남자는 여자의 동네에 내리기로 마음 먹는다.
거기서부터 다시 기억이 시작된다.
남자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쉬었다 갈 만한데 없어?"
여자,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일부러 모른다고 대답한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어디로 걸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가는 길에 남자가 묻는다.
"너 나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지?"
이 남자, 이런 시건방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여자는 궁금하다.
발바닥인가.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예전에 알았던 어떤 오빠를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한다.
다시 기억의 단절.
노래방인 것 같다.
남자가 무슨 노래를 한 것 같은데 여자는 역시나 기억이 없다.
다만, 발라드였던 것 같은데 꽤 노래를 잘한 것 같다.
박수나 쳐 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키스.
여자는 남자가 참 키스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노래방을 나온 시간이 아마 4시쯤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여자, 갑자기 집에 혼자 가겠다고 말한다.
원래 남자 손에 안 가기로 유명한 여자가 여기까지 와서 키스까지 해놓고,
이제는 집에 혼자 가겠다고 한다.
여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우습다고 여긴다.
남자가 말한다.
"번호 줘."
여자는 아무런 거절없이 그 남자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천천히 번호를 찍기 시작한다.
아, 취하긴 했나보다.
여자는 가운데 번호를 틀리게 눌렀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여자가 번호를 누르는 동안 남자는 담배를 한 대 태운 것 같다.
막무가내로 집에 혼자 가겠다고 한 것 같다.
남자, 역시 아무런 말 없이 간다.
여자의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쯤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잘 들어가고 있냐는 안부의 전화다.
여자, 속으로 정말 나 혼자 가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분명, 여자가 혼자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겼겠지만,
사실 그것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여자, 일요일은 하루종일 집에서 쉬기로 한다.
배구 경기 관람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그 남자를 다시 보자니 부끄러울 것만 같다.
'집에 잘 들어갔어?'
여자, 문자를 보낸다.
그러다 문득, 그 남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음을 안다.
키스까지 한 남자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니, 여자, 허탈하게 웃는다.
'잘 들어가고 잘자고 이제 일어났어. 일찍 일어났네?'
어제의 일이 떠올라 여자는 왠지 부끄러워진다.
좋기도 하지만 부끄러운 생각이 더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와 사귈 생각이 드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키스 한 번으로 마음이 동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따 배구 보러 올거지?'
남자의 문자다.
그래, 여자는 가기로 결심한다.
'응 이따가 가야지'
'그래 이따봐~'
일요일, 올림픽 공원
또 여자는 약속 시간에 늦어버렸다.
티켓을 들고 나와서 그 여자와 친구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임 운영자 옆에 그 남자가 서 있다.
그러나, 그 여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다.
술이 덜 깬 탓도 있지만 어쩐지 수줍다.
그리고 그 남자도, 어색한건지 따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요일 하루 내내, 그 남자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월요일.
일상으로 돌아와 사무실 앞에 앉아있으니 그 여자는 헛웃음이 난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길고 긴 꿈을 꾸고 돌아온 것만 같다.
화려한 휴가를 보내고 온 것 같다.
여자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너 처음 보는 남자랑 키스할 수 있어?"
친구가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여자 대답한다.
"글쎄, 말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못할 것 같아."
못할 것 같다고 했었다.
어쩌다 이렇게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했을까.
여자는 또 다시 헛웃음이 난다.
시간이 지나도 남자는 연락이 없다.
번호를 달라고 했으면 연락이 올 법도 한데 아직까지 없다.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드문드문한 기억에 의심이 생기고,
결국엔 정말 화려한 휴가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화려한 휴가.
그 순간만큼은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그 휴가, 사치였다며.
아직까지도 남자는 연락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하기에는 그 여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기다려볼 작정이다.
정말이지 사귈 마음은 없지만, 다시 한 번 맨정신에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다시 만나 진한 키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남자가 생각이 나고, 부드러운 입술이 생각이 난다.
그 여자, 화려했던 휴가를 그리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