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프롤로그
조금 일찍 사무실에 왔다. 사무실 한가운데 위치한 회의용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누군가가 먹다 남은 바나나 우유가 외로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조금은 여려 보이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노란색 옷 안쪽으로 개나리색의 그녀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신분증이 있는 포장지로 자연스레 내 눈이 갔다.
[ 진한 바나나 우유 ; 내용량 300ml, 열량 225kcal, 탄수화물 33g, 지방 7.5g, 단백질 6g,
회분 1.2g, 나트륨 165mg, 칼슘 180mg, ... , 바나나향 첨가, DHA극미량]
‘바나나향 첨가’ - 이 글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아이처럼, 혹은 코끼리를 처음 보고 놀라는 아이의 마음처럼 두근거렸다. 믿기 싫었다. 바나나향 첨가, 이것 때문에 그녀가 우유인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어떤 누구도 진짜 그녀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었다. 바나나 옷을 입고 바나나 향을 내고 있으면 그녀는 바나나 음료인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본질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 너는 누구지?
그녀가 대답해왔다. 세상에 지친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어느 누가 들어도 그녀가 바나나가 아니라 우유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 바나나 우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틱.텍.텍.틱’ - 의미를 알 수 없는 책상위 시계소리만이 퍼져 사무실의 빈 공간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시계 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의 끝으로 퍼져나갔다. 시간의 공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길게 다가왔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 아무도 내가 누군지 신경 안 써. 바나나 옷을 입고 바나나향만 뿌리고 다니면 사람들은 내가
바나나인 줄 알아. 아무도 본질에는 관심이 없어. 실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99%의 우유보다
1%의 바나나향에만 관심이 있어. 진짜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지. 바나나향이 첨가되는 순간 그 전에
있었던 우유는 더 이상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지. 더 웃긴 것은 진짜 바나나도 아닌
바나나향이라는 가짜가 진짜 나 인척 내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나는 고개는 끄덕이지 않았지만 바나나우유의 말에 동의하였다. 바나나우유. 한번도 그녀를 우유로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녀의 본질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나의 대뇌피질을 자극 하는듯한 날카로운 공격을 해왔다.
- 너는 아직도 네가 진짜라고 생각하니? 잘 생각해봐, 너는 누구니?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니?
한참을 생각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다. 현시점에서의 내가 나를 대표하는 내가 되어버린다. 내가 누구였던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누구일까?
[이름 이원백 ; 성별 남자, 나이 27, 키 181cm, 몸무게 76kg, 혈액형 B형, 학력 대졸,
직업 S기업 인사과 사원 1년차, 종교 천주교]
‘S기업 1년차 사원’ - 이것을 생각해 내는 순간 내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거짓말을 주장하였던 유일한 지구인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마음처럼 답답해져 왔다. S기업 1년차 사원, 이것이 지금 나를 표현 할 수 있는 단어의 전부이다, 마치 그녀에게 첨가된 바나나향처럼. 나에게 주어졌던 지금 몇 개월의 시간이 전체 나를 대표하는 그런 신분이 되어버린다. 그 어떤 누구도 진짜 내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아무도 나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가 말을 해왔다.
- 너를 찾아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눈이 없어 나를 바라 볼 수 없는 그녀는 우유팩 안에서 노란 물결을 만들어 내면서 나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다.
- 너가 너일 수 있는 이유를 찾아봐. 사랑했던 사람들, 99%의 너를 존재하게 했던 사람들을
찾아봐. 너의 본질을 말이지. 그럼 진짜 네가 누군지 알 수 있을꺼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 태초의 목소리가 존재했다면 지금 그녀의 목소리와 같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태초의 그분이 지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사르트르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였다는 것을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나에게 하나의 중요한 사명 - 나의 본질을 발견하여, 사르트르를 부정하는 것 - 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아서 혼자 생각하였다. 나를 존재하게 했던 사람들. 내 사람들. 내 여인들. 그리고 나의 진짜 에고를 위하여.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을 계획하고 있어요. 옴니버스식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일단 프롤로그 올립니다. 내 인생의 여인들을 소설에 등장 시킬려고 해요.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10명의 여인을요. 반 정도 썼는데, 몇일 간격으로 조금씩 조금씩 올릴께요, 부족한점, 많은 코멘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