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룩절룩...
몸과 마음이 따로 호두밭을 빠져나오면서 긴장감과 함께 버무려지는 느낌이란...
그때 문득 그 얘기가 생각이 났다.
언제부터인가 학교가는길 중간쯤에 허름하다시피 중년쯤의 낯선 아저씨, 아줌마 두분이서
판자데기를 엮어서 건물을 짓기를 한달정도,
지붕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문앞에 얼기설기 대패로 밀어낸 판자에 'XX교회'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다음날 우리들에게 책을 선물해주셨다.
일요일날 찾아오면 노래도 가르쳐주고, 맛있는것도 사준다는 두분의 달콤한 거짓말에 혹시나
찾아갔던날 그말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였다.
그렇게 해서 찬송을 배우고 하느님을 알게되던 어렸던 그때,
우리들은 목사님이 들려주시는 성경말씀에 폭 빠져 들어서 주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악한자들에게 최후를 벌하시는 '소돔과 고모라'의 결말을 접하면서 권선징악의 교훈을....
근데 왜하필 바로그때 그 말씀이 생각이 난 것일까?
지금 기억으로도 잘못, 뒤를 돌아보게 돼 소금기둥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울 뻔 한 순진했던 유년시절.
겨우 긴장감이 추스려지기 시작한건 징검다리 개울가에 다다라서 이다.
휴~
길게 안도의 한숨으로 그제서야 마음이 진정된다.
구름을 빠져나온 달빛이 온 사방을 환하게 비춰오고
소살소살소살.....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에 두손을 담궈 언거푸 얼굴을 훔쳐낸다.
하나... 두개... 시개, 네개... 이곳저곳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호두 갯수를 헤아려 내어놓고
겉부분을 돌맹이에 갈아 벗겨내기를 한참
이제 이 달콤하고 고소한 호두를 소녀에게 선물을 해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에
소년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아차!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다.
소녀가 이사를 가기 전, 호두를 건네줘야 할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언제 이사를 가는지 조차 소년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곧 다가오는 명절을 지내고 이사를 간다고 했었나?
약속은 정하지 않았지만 오늘처럼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기다리다보면 소녀를 만날 수
있겠지 위안을 삼아서 집으로 향한다.
조심스레 사릿문을 열고 최대한 소리죽여 방으로 들어선다.
"뒷간에 갔다오니?"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신 아버지께서 깨어나 물으신다.
"예?.... 예!"
"녀석 놀라긴... 꼭 도둑질하다 걸린것마냥..."
허억~!!!!
"늦었다 자거라~"
"예, 안녕히 주무세요"
휴~
아침.
모든것이 시작되는 소리
그 처음을 알리는 것은 앞마당 시뻘건 볕을 자랑삼는 수탁의 훼치는 소리다.
이어서 대청마루를 걸어나와 요강단지 들고 신발을 끌어나가시는 아버지의 발소리
'저기 불좀 켜봐요'
한낮에도 60촉 백열등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컴컴한 재래식 부엌, 유난히 높은곳에 설치된 스위치를 켜려고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아궁이 불지피려 희나리 사이에 마른장작 골라내는 소리
꼴꼴꼴꼴.... 끼윽끼윽..... 펌프질 물소리....
'허엄...험!'
찌그러진 양은 세수대야 하나가득 받은물을 앞에두고 아침세수 하시기전 아버지의 헛기침소리.
언제, 어느때고 변하지 않는 아침을 맞는 소리, 그 다음에야 비로소 소년이 등장한다.
"어야~ 벌써 맻신데 아직도 안닐어 나냐, 허구한날 늦잠이냐 빨리 일나라"
하루도 걸러지지 않는 어머니의 꾸중소리가 지나간 다음에야 소년은 꾸부적꾸부적 설익은 잠을 쫒으려 눈을 비벼댄다.
더욱이 어젯밤 행사치레(?)로 설친 잠에 몸이 더 무겁다.
고양이 세수, 물말아서 허겁지겁 아침밥을 해결하고, 발이달려 사방팔방 도망가 있는 공책이며 책, 학용품들을 주워담아 책보를 챙겨들고
참, 제일로 중요한걸 빠뜨릴뻔 했다.
알이 굵고, 골 깊이 주름이 확연한 호두가 더 맛좋고 고소하다는 누군가 일러주던 정보를
기억해서 한참을 골라 호주머니속에 호두두알을 넣었다.
"이녀석아 왜이리 칠칠치 못하게, 벤또(도시락) 안갖구 가냐"
한참 걸어나온 대문까지 다시 되돌아 어머니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들고 등교길에 오른다.
교문앞에 도착하면서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오늘은 또 친구들의 약올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막막하게 무거운 한걸음 한걸음...
"야, 니 그 지지배하구 뽀뽀 해봤냐?"
"니보구 사랑한대디?"
아침자습시간 책상에 앉아 책보를 풀기도 전부터 삼삼오오 모여든 급우들의 놀림은 시작이 되었다.
"니놈들 그만 안둘테야?"
참다참다 성질을 내면 두어걸음 도망치는 듯 하다가는 자기들끼리 재밌다고 키득키득 거리다간 다시금 접근하고, 또 놀려대고...
하지만 친구들의 놀림은 무시무시한 재앙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했다.
아침조회를 마치고 담임선생님이 퇴실했을때 덕쇠가 내 자리앞에 다가왔다.
"너 잠깐 나 좀 볼래?"
왜?
멍하니 덕쇠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을때, 덕쇠는 뒤돌아서 교실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싸운일을 곰곰히 반성해서 사과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멋진말로 다시한번 덕쇠의 잘못을 훈계함과 동시에 너그러운 용서의 악수를 건네는
인자함을 보여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소년 역시 뒤를 따라 나섰다.
미안하다는 말에 친구들이 볼까 챙피해서 그런가?
화장실 뒤 어슥한 곳까지 가고 있는 덕쇠를 따라가던 순간.
소년은 뭔가 불길함이 엄습해 옴을 느꼈고 갑자기 머리가 쭈뼛서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설마.....
부서진 책,걸상들이 난잡하게 쌓아진 그곳에 덕쇠는 거만한 자세로 다리하나 부서진 책상에 커다란 덩치를 비스듬이 기울이고 앉아서 소년을 힐끔 쳐다본다.
그때의 시선.
'나는 네가 지난 밤에 한일을 알고있다' 하는 뉘앙스가 그 눈빛에 소름처럼 녹아있었다.
하지만 아직 섣불리 판단은 금물이다.
태연한 척
"나 지금바빠 수업시간 예습도 해야하고, 용건 있으면 빨리말해"
"너 지금 나한테 그리 뽀댈 수 있는 입장이 아닐건데"
아, 들켰구나. 나름대로 완벽 범죄(?)라고 자부를 했었는데 위기에 다다랐다. 하지만 끝까지
잡아떼야 한다.
"너 어제 밤에 우리 호두나무숲에 몰래 숨어들었지?"
"웃기지마라 어제 밤에 집에서 그냥 잤다"
"거짓말 마, 내가 다 봤다. 몰래 숨어들었지"
"생사람 잡지마라"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좋아, 증거가 나오면 어쩔테야"
순간 덕쇠는 소년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어제 개울가에서 호두껍질을 갉아내면서 들은 호두물이 누르스리하게 든 손바닥을 보여버렸다.
흐흐~ 입에서 바람이 세어나오는 듯 흘리는 덕쇠의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소름이 끼친다.
"이래도 잡아 뗄테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고, 누르스리하게 호두물 들어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이제 소년의 운명은 덕쇠가 쳐 놓은 그물망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처량한 피래미 신세가 되어버릴 위기에 쳐한것이다.
"끝까지 잡아뗄레?"
대답할 기운도 없이 소년은 최후의 발악으로 파랗게 질린 입술을 굳게 닫고는 고개짓만 도리도리 해보였다.
하지만 덕쇠는 소년의 입장에는 아랑곳 없다.
"좋아 그 오리발이 언제까지 가는지 이따가 학교 끝나면 할아버지께...."
냉정하게 휙 돌아서는 덕쇠의 팔을 소년은 순간적으로 낚아채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서있던 후들거리던 다리가 풀리고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게임오버!!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덕쇠의 극치의 오만함을 올려다 보면서 소년은 그만큼 서러움의 눈물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잠시 뒤 그렇게도 초라한 소년의 모습을 한껏 감상하고난 덕쇠는 비열한 조건을 제시했다.
"좋아~ 할아버지께 어제 너가 호두 훔쳐간건 일르지 않는 대신에 내가 시키는대로 할테야?"
훔쳤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소년으로써는 눈물샘이 피잉 터지기 일보직전의 눈으로 덕쇠를 올려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그때부터 그의 지옥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각 학급 60여명의 급우들과 4분단으로 이루어진 반 편성
요일 분단별로 돌아가면서 이루어진 청소담당의 몫은 항상 두배가 되었고
점심시간에는 교실뒤쪽 주전자에 있는 물을 컵에 따라 덕쇠가 밥먹는 책상에 하루하루 갖다 바쳐야 했다.
토요일대청소 하는날도 소년에게 주어진 청소구역은 유리창을 닦는 것 말고도 학교 뒤 화장실청소까지 자기의 몫이 되었다.
참고로 숙제도 않해오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않는 급우들이 담당하는 청소구역이 대표적으로 화장실이였다.
그러한 괴롭힘은 방과후에도 이어진다.
"나 운동장에서 축구차고 갈거니까 내 가방좀 우리집에다 갖다놓을래"
"......."
하교시간이 다른때보다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고난의 시간은 계속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달게 받아 넘길 수 있는건
호주머니속에 알이 굵은 호두가 만지막 거려지는 이유 때문이다.
소녀가 이사가기 전 호두를 선물로 받아들고는 보조개진 미소를 지어보이는걸 볼 수만 있다면....
그런 이유로 맑은물 흐르는 냇가의 징검다리를 향해 소년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도 헛탕일때는 덕쇠의 가방까지 몸은 더욱 무거워짐을 느낀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커다란 다라를 머리에 이고 엄마도, 동네 아주머니들도 송편을 지을 쌀을 빻으려고 방앗간으로 향하신다.
그리고 이미 와서 대기하시는 아주머니들로 방앗간 주변에는 길게 줄을 서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머리가 큰 형들을 중심으로 송편끼리 달라붙지 않게 사용할 솔잎을 따기위해 근처 야산으로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건 동네 아이들 몫이다.
도시에 사는 작은아버지, 삼촌과 고모들이 언제쯤 온다는 연락을 받고 사리비를 찾아 앞마당을 슬어 단장하시는 아버지
또하나, 아버지분들에게는 추석명절을 준비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하나 더 남아있다.
우리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이 되어있는 출입공간인 변소를 화장실로 바꿔보려고 부단이 노력해야 한다.
어차피 앞마당에 돛자리하나만 깔면 밥상이 되고, 빨갛게 익은 고추를 널어놓으면 자연건조대가 되고 대청마루 구석에 놓아둔 사료를
한주먹 집어서 휙 던져놓으면 그것에 맞추어 푸드덕 달려드는 닭들이 있을땐 닭장도 되는 앞마당이다.
몇해전에는 고모가 연지곤지 찍고 부끄러운 얼굴로 조카들에게 처음으로 고모부를 소개시켜주는 시집장소가 되었던 마당.
그 한곁에 너덜거리는 문짝속으로 배설의 내용물을 책임지는 공간을 친식구들은 차치하고라도 고모부나 계수씨에게 내어주는게 아버지
로써는 영 쑥스러우신가 보다.
어디에서 깡통에 반쯤찬 페인트를 얻어오신 아버지는 옷에 튀어 버리는 페인트에 아랑곳없이 어색한 칠 놀림을 한참동안 하고 계신다.
어차피 그래봐야 우리들이 싸 재낀 내용물(?)이 두눈에 그대로 보여지는건 달라질 게 없는데....
그렇게 하늘은 높고 말이 살 찧으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대미를 장식할 추석명절이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설레임의 계절이건만
소년은 그냥 그대로 가슴이 부풀지만은 않다.
명절이 지나면 이사간다는 소녀를 아직 만나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는 지금 이런 내마음을 알기나 할까?
야속하기만 하고... 하지만 그런만큼 소녀가 너무나도 보고 싶기만 하다.
그러한 사념들을 머리속에 그려대다가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잠깐 설잠이 들었었나 보다.
어느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곧 돌아올 명절차례상에 쓰일 제기(祭器)를 손보시는 부모님의 대화를 잠결에 얼핏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