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내가 이 세상에 태어 난지 어느덧 육십 하고도 팔년 이 더 지나 육십 팔세 라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내 한갑 날 잔치 마당 에서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 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 으로 많은 하객 들에게 자랑 이라도 하는 것 처럼 보여 주었고 또 내가 만들어 부른 노래 내가 만든 노래 부모 마음 이란 노래를 부르며 내 눈 에서도 눈물이 나왔고 자식들 눈에서도 눈물을 떨어 지는 것을 보았다 . 눈물은 사람 에게만 있다고 하였다.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감정 은 인간 에게만 있다고 하는 의미도 된다 .내가 세상에 태어 날 때는 부모에 은덕으로 태어 낳고 부모님에 사랑을 받으며 아무 탈 없이 잘 자라서 여덜 살에 초등 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내 나이 열살 되는 초등 학교 이학년 에 6.25 동난이 일어 났다 .그 당시에는 할머니도 계셨고 아버지 어머니에 보살핌으로 난리 라고 해도 별로 고통은 느끼지 않았고 6.25 사변을 넘겼다 .북한 군에게 점령 당했든 국토가 수복 되고 늦게 나마 다시 학교 가 시작 되어 학교에 다니면서 흔해 빠진 검정 색에 흰띠 내린 팬티 하나 입어 보지 못하고 런닝 샤스 하나 입어 보지 못하고 학교 라고 다니든 중 오 학년이 되는 여름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 신지 십여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내 나이 열세 살 이었다.그때만 해도 어린 나이 었지만 삼베 보자기 머리에 눌러 쓰고 어머님 따라서 삼년간 조석으로 아버님 고연에 식사를 챙겨 드렸고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다른 집 보다 먼저 해야 한다고 하여 아버님 사진도 없는 영전에 통곡 하며 울어 주었다 .사진도 한장 없는 아번님 고연 이었지만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아침 저녁 으로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 삼년 상을 나는날 삼베를 접어서 만든 혼백을 아버지 산소 마당에 묻고 나니 더 없이 쓸쓸 하였다 .어머님에 연세는 마흔 하나 그러나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슬픔도 멀리 한채 동문 서주 하면서 철없는 자식들 굶주리지 않게 먹여 살리려고 괴로움도 많았겠지만 드러 내지 않으시고 열심히 일만 하시었다. 나는 어머님에 불철 주야로 보살핌으로 아무 탈 없이 무럭 무럭 잘 자라서 초등 학교를 졸업 하고 중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가정 살림이 어려 웠고 나도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해서 인지 이 학년 에서 중퇴 하고 말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랬었는지 막상 학교를 그만 두고 나니까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통신 학교로 중앙 통신 중고등 학교 강의록 을 시작 을 하여 중 고등 학교 강의록 을 끝내고 보통 고시 강의록 시작 해서 한 권도 채 끝내기 전에 군에 입대를 하고 말았다 .때는 1962년 내 나이 수물 두살 혈기 왕성한 청년 이었다 .광정 정류소 까지 배웅 나오신 어머님 나를 뻐스에 태우고 돌아서는 어머님에 뒷모습 을 보는 순가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손을 잠시 멈추었다 .가슴이 메어 지는 듯한 감정을 진정 하면서 나도 모르게 닿은 곳이 논산 훈련소 보충대 연병장에 들어 서기가 무섭게 검정색에 하얀 띠 돌린 화이바 쓴 기관병 불 호통에 돌아서든 어머님에 뒷 모습은 멀어 가고 조교 들 구령 따라 앉아 번호 하면서 이리 몰리고 저리 밀리 면서 눈가 에 촉촉 하게 맺혀 있든 눈물도 말라 버렸다 .비는 오지 않고 햇볕은 왜 그렇게 뜨거 웠든지 입고간 나이롱 팔 등거리 땀에 찌들어 버석 버석 벗은 옷 포장 해서 집으로 보내고 군복으로 갈아 입은 날이 1962년 7월26일로 기억되고 있다 .육주간에 전방 기훈련을 끝내고 포병학교 가서 팔주간 에 포술 교육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