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응."
"그런 얘기를 뭐 그렇게 무덤덤하게 하는 거야?"
"그런 감정을 호들갑 떨면서 얘기 할 나이는 지난 거 같아서."
나의 돌발 발언에 현주는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서 놀라게 하는 건 의외로 즐거웠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현주가 생각보다 반응이 커서 좀 더 있다가 말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
"친구."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
"누군데?"
"올해로 알고 지낸지 4년쯤 됐나?"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러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기에 4년은 너무, 뭐랄까……."
"왜? 좀 생뚱맞나?"
"응.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순 없잖아."
"그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긴 한 걸까. 좋아한다는 표현을 써도 좋긴 한 걸까.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나란히 서 있던 커플 미니미를 끊고, 가족만큼이나 가깝다는 일촌도 끊어버리고, 핸드폰에서 번호를 지우고, 함께 찍은 사진마저 다 지워버리고, 다시는 전화도 하지 못하고,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는 걸 이별이라고 한다면, 나는 정확히 3년 전에 그 사람과 이별했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느낀 감정이, 그 이후로 그렇게, 정확히 3년만이었다. 3년 만에 느낀 이 감정을 '좋아한다.'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긴 한 걸까. 너무 긴 시간, 마치 현주와의 약속 이외에 예상치 못한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난 것처럼, 그 사람과의 이별 이후로 예상치 못한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 동안에 느낀 외로움을 '좋아함'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 사람도 알아?"
"누구?"
"당사자. 니가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
"글쎄, 내가 말은 안했으니까 일단은 모르겠지."
"그 사람 마음은 어떤 거 같은데?"
"우리 그냥 친구야."
"이젠 우리가 아니지. 넌 그 사람을 친구로 보고 있질 않잖아."
"그런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넌 누굴 좋아하면 너무 금방 티가 나."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이야기이긴 했다. 4년을 알고 지내다가 이제와 문득 친구가 아닌 남자로 보이다니. 아니, 정말 이상한 이야기인가. 탤런트 김지영과 남성진도 드라마 '전원일기'를 찍는 내내 아무 일 없다가 나중에서야 커플이 되고 결혼까지 했는데. 가수 이지혜가 부른 노래 'Love me love me' 만 들어봐도 오래된 친구에게 사랑을 느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는데. 그깟 4년 만에 묘한 감정을 느낀 게 정말 이상한 이야기가 될까.
2004년 늦가을쯤이었나. 멀쑥하게 키만 크고 비쩍 마른 성수를 처음 만났다. 청바지에 검은색 자켓 차림이었다. 생각보다 키가 크다는 사실에 놀랐고,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알고 보니 재미있고 활기찬 사람이었는데, 처음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낯가림이 있어서 몇 마디 안 하고 그냥 헤어졌던 것 같다. 같은 학교 다른 과에 다니던 친구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별다른 감흥은 못 느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 사람과 함께였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려고 하는 그 사람 때문에 한참이나 지쳐있을 때였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그냥 놓아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을, 그때는 그럴만한 용기조차 없어 안절부절 해가며 그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때, 그렇게라도, 힘들게라도 그 사람을 놓아버리고 괜한 술 한 잔에 성수에게 기대었더라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아무 일 없이 이미 쓰여 진 역사처럼 얼마 안 가 성수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고, 나는 계속해서 그 사람과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까.
"근데 사실,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뭐가 그래?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자꾸 걔한테 뭔가를 바라게 돼."
"뭘? 그 사람도 널 좋아하길 바라는 거야?"
"글쎄.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게 뭐야?"
"걔가 어쩌다 내 손만 잡아도 떨리고,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보겠어."
현주는 마치 내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고민할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는데. 현주가 내 감정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괜히 말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현주에게 3년 전에 그 사람과 헤어진 이후로 그 사람 말고는 다른 남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잘 안 꺼낸 탓도 있지만, 그래서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날 대하는 현주 마음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놓고 나니 정말 내 감정이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될까봐 두려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말을 내뱉은 순간, 그 순간부터 작은 불씨 하나는 마치 온 집안을 삼킬만한 커다한 화염 덩어리가 되고 만다. 특히나 어떠한 감정과 어떠한 사람에 관한 말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가슴 속에 담고 있을 때만 해도, 사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조언을 구하기 위해 혹은 위로를 받기 위해 밖으로 툭 던지는 순간, 그 하나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마침내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진지하게 논의를 한다. 잘한 걸까.
"그런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뭐?"
더 이상 현주를 바라보지 않고 탁 트인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길거리는 한산했고 간간히 친구인 듯 한 서너명 정도의 무리와 커플들이 보였다. 바닥에 남아있던 카라멜까지 박박 긁어 휘휘 저어서 녹인 커피를 한 잔 쭉 들이키며 말했다. 너무 달아서 그만 마실 법도 한데 인상까지 써가며 그걸 굳이 끝까지 들이켰다.
"왜 이런 내 감정을 재현이한테 이야기하고 싶지?"
"재현이? 왜?"
"질투하길 바라는 걸까?"
"질투? 왜? 질투할 것 같아?"
"아니, 그냥 무덤덤하게 들을 것 같아."
"8년 동안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간 사람한테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얘기하면, 어떤 누가 무덤덤하게 듣겠어. 다만 티를 안 낼 뿐이지."
"그럼 감추지 못하는 티라도 내면 좋겠는데."
"그 욕심이 어딜 가?"
"욕심인가, 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가끔 이렇게 현주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게 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욕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에 욕심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그렇다고 욕심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어느 한 편에서 분명 재현은 나에게 있어서 욕심이었다. 마치 계륵처럼 남 주기엔 아깝고 내가 가지기엔 뭔가 부족했다. 지금 그토록 재현을 괴롭히는 과거의 그녀, 재현의 그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불쑥 불쑥 뭔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듯 했지만, 재현과 내가 연인으로서의 서 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상상하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문장이 떠올랐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내일 재현이 만나기로 했는데."
"말할 거야?"
"모르겠어.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뭐가 달라지길 바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런 말 해 봐야 뭐가 달라지겠어. 지난 8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또 아무 말 없이 넘어가겠지."
"니네 둘 관계는 참, 오묘해. 어떻게 그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거야?"
"둘 다 말하지 않으니까.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욕심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사랑이 깊어지면 사랑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문제가 된다. -전경린 '내가 돌아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