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냐 편하게 옷 갈아입고 있어라 엄마가 금방 저녁 준비할테니께"
미닫이문 활짝 방문을 열어재키면서 오랜동안 잠들어 있었을 방이 기지게를 켠다.
흙으로 빗은 집, 황토와 짚이 어그러진 냄새가 코에 와 닿는다.
'이 냄새야!'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서울로 유학가기전 방은 그대로다.
책상에 꽂아놓은 책들이나, 스탠드, 트렌지스터, 한쪽에 붙여진 좋아하는 영화배우 포스터까지
하나같이 모두 '어서와' 한다.
바지 밑부분, 소매끝부분이 헐거워진 고등학교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XX년, X월
죄와 벌. XX년, X월
적과 흙. XX년, X월
주홍글씨. XX년, X월~ 동년, X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시간가는지 모르고 새벽까지 독서에 빠져 있다보면 난 밀란 쿤테라가 되어있고, 베르테르의
슬픔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딤즈데일의 입장에서 칠링워스의 입장에서 헤스터 프린에게
가해지는 주홍글씨의 의미를 스스로 문제제기 해보곤 했었다.
그렇게 책들을 낱장으로 훑어보기도 하고, 대학입시 준비하던 참고서와 책들도 소설책에
어우러져 꽂아져 있다.
자칫, 대입시험 끝난 다음날 지긋지긋 했다면서 학교 소각장으로 가지고 나와 참고서를
화형시키자는 친구들의 의견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 했더라면 여기에 있지도 않을 책들이다.
또, 학생과 선생님에게 불려가 허벅지가 검붉게 피멍이 지도록 타작의 결실을 맺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젠 그것도 다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어머니, 야 왔다면서요"
낯익은 목소리.
"어~ 니 왔냐. 야는 지 방에 있을거다. 그리고 처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너무 튼실해서 탈이지요 헤헤"
"아침마다 쌀쌀한게 몸 조심하라구 하고, 이따가 김치 좀 가지구 가라"
문밖의 목소리로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친구다.
"야 일마야 형님 오셨다."
"어 그래 어서와라. 안그래도 지금 찾아가려고 했는데 어찌 알고 왔네"
대청마루까지 나와 반기는 친구, 덕쇠다.
"신작로 지나가다가 아버님 뵜는데 니 왔다해서 이리 들렀다"
어렸을적, 그보다 더 오랜 태어났을때부터 위, 아랫동네에 사는 각별한 친구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누구보다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있는 친구.
그 친구는 이제 밀집모자에 햇볕에 그을린 얼굴, 무릎까지 주섬주섬 말아올린 통이 넓은바지
고무신 차림으로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고,
조만간 한아이의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고있는 듬직한 가장이다.
"밥 다 되아간다, 어데 간다고 그러냐, 덕쇠도 함께 밥 먹고 가지"
"금방 다녀 올께요, 덕쇠 할아버지께 인사도 드리고, 순이..... 계수씨도 좀 보려고요"
또 실수 할뻔 했다.
덕쇠 처도 동구밖 함께 뛰어놀고 개울가 빨개 내놓고 물장난 치던 소꿉동창 이였기 때문인지라 아직 계수씨라는 존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다.
날씨얘기와, 요즘한창인 농사관련된 얘기를 듣기도 하고, '서울'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명소가 63빌딩일까? 난데없이 '니 63빌딩 가봤냐?' 묻는 친구의 질문에 피식 웃다 보니
어느새 징검다리가 내려보이는 다리까지 다다랐다.
"덕쇠야 우리 저 징검다리로 건널까?"
"야 왜 편한길 냅두고 힘들게 저기로 가냐?.... 흐흐 너 예전에 걔 생각나서 그러는 겨?"
"쓸데없는, 아냐임마 그런거"
"아니긴 뭐가 아냐 벌써 얼굴이 씨뻘거 지느만 흐흐"
허멀건 웃음을 흘리는 친구를 보면서 나도 웃는다.
그도 그럴것이, 어릴적 징검다리에서 소녀를 만났을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순수한 기억
한 구석에 고개를 설레짓게 만들 짓궂은 장난속, 친구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허심탄회하게 비밀이 없이 지내던 친구의 믿음이 너무나도 지나쳤던 어릴적
그는 덕쇠에게 소녀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징검다리 가운데에서 물장난 치고있는 소녀에대해서
갈대밭에 숨어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있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또 함께 언덕너머에 있는 다른마을과 들판을 뛰놀던 일들과
소나기를 만나 옷이 흠뻑 젖어버린 이야기
그리고 돌아오는 길.
소나기로 한참 불어난 개울물을 앞에 두고 어쩔줄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소녀를 보면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려 소녀를 등에업고 개울을 건너던 모습....
그때 그 얘기까지 했었을까?
개울가를 위태위태 건널적, 소녀는 행여 물에 빠지지는 않을까! 소년의 목덜미를 더욱더
꼬옥 안아쥘때 느껴지던 이상야릇한 감촉!
그건 엄마,누나,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특별히 다른,그렇지만 뭐라 설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의 무언가였다.
하지만 다음날... 또 다음날....다음....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시간...
그만큼의 크기가 더하지고 덜하지도 않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걸 덕쇠에게 털어놓은
비밀이야기가 화근이 되어버린 건 다음날이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이어지는 일상.
등교길 복도에서 부터 교실에 얼굴 빼꼼 내밀던 반 아이들이 나를 아는체 하며
'온다, 온다' 소리와 함께 난리들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교실문을 들어서는 순가 '오, 이런'
칠판에는 나와 소녀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져, 아래엔 삐뚤빼뚤 어거지 그림으로 우리를
표현해 놓고, 그 사이에 턱허니 하트문양이 헤집고 들어가 있다.
책상을 헤집고 달려나가 칠판지우개로 사정없이 내용물을 지워 나갔지만 이미
친구들 머리속에 장착되어 버린 나와 소녀와의 관계는 잔잔한 호숫가에 돌멩이 하나 떨어져
물이랑이 번져나가듯 여러가지 시나리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조회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 1교시,2교시....
쉬는시간이면 책상 주변으로 몰려드는 반 아이들에, 리듬을 타는'얼레꼴레'의 장단으로 한참
받아버린 스트레스가 폭발해버린건 점심시간 이였다.
내 주위에 몰려있는 녀석들보다 그 뒤에서 히죽히죽 재밌어라 웃음을 흘리고 있는 덕쇠의 모습에 더한 배신감이 들어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였고 교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분명 내가 날린 주먹은 덕쇠에게 정확하게 날아갔다.
....
거기까지다.
나보다 뼘이상으로 키가 크고
덩치로도 옆으로 훨씬 넓다란 덕쇠다.
오후 학교수업이 끝나고
퉁 부어터진 입술, 시퍼렇게 멍이든 눈두덩이로 축쳐진 어깨, 절뚝절뚝 신발을 끌며 초라한 몰골로 누구하나 함께가 아닌 혼자서 하교길을 맞고 있었다.
분하다.
억울하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와앙~
비단, 분하고 억울한건 주먹으로 안되는 덕쇠와의 싸움에서 흠씬 두둘겨 맞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였다.
항상 언제나, 어느때고 이렇게 개울가에 서면 징검다리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물장난을 치고
있을것 같던 소녀를 보지 못하는 그 사실에 눈물이 나는 것이였다.
주체하지 못하게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기를 여러차례 하던 그때
"얘 왜그러니? 왜 울고 있어?"
거짓말 같았다. 금방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소녀가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푸른요정 같았다.
저번 명절때 멀리서 오셨던 친척분이 선물로 사다주신 그림동화책,
인간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목각인형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던 예쁜 요정
소녀의 모습과 요정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얼굴이 이게 뭐니? 누구하고 싸웠니? 왜 싸우고 그래"
걱정스러운 얼굴로 흙먼지를 뒤집어 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싸운거 아니다. 나 싸움 잘해 돌부리에 넘어진거야"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객기로 삼아 몰골을 부정하려고 그는 애쓰고 있었다.
"요즈음 왜 오지 않았니?"
"응, 그동안 많이 아팠거든"
"지금은.... 괜찮아?"
대답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짓는 소녀의 모습이 보기에도 많이 수척해, 힘들어 보인다.
"나 곧 이사가. 난 가기 싫은데 어른들이 결정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어"
"....."
"그거 너에게 얘기해 주려고 아직 아픈데 일부러 나온거야"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을 앞에 두고 아무말 없이 고개만 숙여서 애꿋게 발로 바닥만
차고 있었다.
"참, 이거 너 주려구 가지고 왔어"
소녀의 조그맣고 예쁜손에 여러개의 대추가 들려져 나온다.
"집 안마당에 손에 잡힐만큼 주렁주렁 달려있어서 따 왔거든 맛있고 달아. 먹어볼래?"
그의 손으로 넘겨주는 대추를 받아들고 하나를 입속에 넣는다.
"알도 굵고 많이 달다"
입안에 볼이 볼록하게 대추를 하나 물어보지만 말과는 다르게 실은 맛을 알 수가 없다.
곧 이사를 간다고?
왜?
어디로?
소녀에게 물어볼게 많은데 그는 단지 맛을 느낄 수 없이 대추알만 우물거려 씹고 있었다.
"그때 내 심술이 너무 짖궂었지?"
"짜식, 알긴 아냐?"
"이노마야 너무 그러지 마라. 나두 알고 보면 무지하게 피해자다. 그때이후로 모든 사건의
이유가 다 내 때문인거 아닐까 죄책감 때문에 그시기 뭐냐... 그래 우울증까지 있었다.
니 그거 알지? 내 오랜동안 학교 결석했던거..."
"그건 니네집 소가 새끼난다고 해서 안나온거 아냐?"
"그건 핑계였지 어디 소가 새끼난다고 학교를 안나오냐"
옛기억을 지나서 덕쇠와 나는 일부러 다리를 놔두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