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를 얹어 몇십년째 대를 이어오는 덕쇠네 집은 멀리에서부터 한눈에 띈다.
그리고 얼기설기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울타리를 주위로 수십그루가 넘는 호두나무가 동네의 명물이려니와 가을엔 아이들의 서리의 온상이 되곤했다.
"색시야 서울서 귀한 손님 왔다"
부엌에서 조심조심 걸어나오는 계수씨는 이미 만삭이다.
"어머 너 왔니? 무지 오랜만....이....네요?"
"몸도 많이 불편할텐데... 계수씨, 방에서 쉬지 무슨 일을 한다고"
서로서로 존칭이 불편하다고 느낀다.
먼저 덕쇠네 할아버지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방에 들어간다.
몸이 많이 안좋아 지셨다.
"할아버지, 저기, 내, 친구요, 서울로, 대학교, 간, 친구가....."
눈도 침침하고, 귀도 않좋아 지신 덕쇠네 할아버지께 귀에 가까이 대고 덕쇠는 날 소개한다.
서울로 유학가는날 동구밖까지 거동하셔서 동네의 자랑이라면서 내손에 쌈지돈을 꼬옥 쥐어주시던 할아버지가 이젠 문밖으로 가까운곳에 마실 나가시기도 힘들다는 귀띔이다.
절을 받으신 할아버지는 손을 휘휘저어 날 부른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꼬옥 쥐어보이며 반갑게 맞이한다.
"아궁이에 불만 지피면 밥 금방 되니까 앉아 있다가 저녁 먹고가요"
"아니, 집에서도 어머니께서 저녁 준비하고 계서서 오늘은 부모님하고 함께 해야지"
대청마루에 계수씨가 타온 차를 한잔 마시고 밖으로 나온다.
알차게 영그러가는 호두나무를 휘 둘러본다.
유년의 한페이지를 즐겁게 장식할 수 있는 공간
엄하시기로 소문났던 덕쇠 할아버지의 감시하에서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작전을 진행해서 어릴적 우리 또래들은 작대기를 흔들어대며
어두운 밤을 틈타 호두서리 공작을 펼쳤었다.
"이런 이, 이 똥물에 틔겨먹을 놈들 어떤 놈이야"
서리를 하다가 들킨들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져 도망치던 우리들은
또다시 할아버지 욕을 흉내내면서 낄낄 거렸었다.
호주머니마다 듬쁙듬쁙 서리해 온 호두를 개울가에 쪼란히 앉아서 겉 열매를 벗겨낸 후
단단한 껍질을 돌맹이의 힘을 빌려, 와작 떨어져 나온 깨끼 손톱만한 열매를 입에넣고 깨물었을때!
유년시절 이후로 아직까지 그 달콤,고소한 맛을 더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맛에 중독되었었던 우리들, 그래서 어김없이 밤이면 호두나무숲의 순례는 멈추어 지지 않았지만 그런 우리들의 범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덜미가 잡히게 된다.
하교길
아직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는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삼삼오오 재잘대며 집으로 향하던 중
느긋하게 곰방대 담배를 태우시는 덕쇠할아버지 옆으로 무릎꿇고 손들어 벌서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여 니들도 일루와 봐"
이미 예상할 수 있는 현재의 그림상태라면
주춤주춤 도망칠까?
하지만 이미 얼굴이 다 팔렸으니... 근데 어젯밤 서리를 어떻게 아셨을까?
"니들도 손바닥 함 펴봐라"
꾸물꾸물 손바닥을 보였을때
"요놈! 요놈! 요놈!"
곰방대는 정확하게 통, 통, 알밤 튕기는 소리로 머리에서 경쾌하게 들려온다.
호두 열매를 벗겨내면서 손에 들여버린 호두물은 왠만해선 잘 빠지지 않는 법이다.
길게는 일주일, 보름 이상까지도 간다.
얼굴 다 팔리게 옆짝꿍 기집애들은 빼~ 혓바닥을 내밀어 약올리고 가는 동안까지 길 옆으로 손들어 벌서는 동안 누구하나 예외일 수 없이 그동안 서리에 동참했던 악당들은 줄줄이 엮여서 호두나무 숲까지 끌려갔다.
"내 생각같으면 이놈들, 죄다 경찰서로 끌고가 콩밥 매겨버려도 속이 안풀릴텐데 니놈들 생각은 으쩌냐"
으
누군가 하늘이 무너지듯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그래요, 울엄마한테 나 맞아죽어요.....
극도의 긴장감을 넘어서 공포감이 밀려드는 할아버지의 폭언에
나약하기만 우리들은 처절하게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니놈들 이 할애비가 한번 용서해 줄테니 오늘 하루 내가 시키는 데로 할 수 있겠냐?"
세상이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던 그 상황에서도 다행히 일말에 희망이 비치고 있었다.
모두들 고개를 세게 끄덕끄덕 해보이며 닭똥같이 흘러내리던 눈물을 훔친다.
"거기, 어여 잡초 뽑아내구 그기에 쪼깐 돌맹이들 줏어서 절로 내쒀라"
할아버지의 지시에 맞춰 누구하나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대충 손등으로
훔쳐내면서 저쪽 산마루로 해가 질때까지 아동학대, 인권유린(?)의 현장은 계속 되었다.
할아버지의 눈에 흡족해 질때까지 이어졌던 노동의 결과에 수고했다는 말대신
"이놈들 한번만 더 서리하다 걸리면 그땐 정말 경찰서에 수갑채우라고 할거니까 알아서들 하고, 알겠어?"
그렇게 해서 우리들 일생일대의 위기는 온몸이 삭신 쑤씨는 육체적고통을 대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군침만 흘려야 하던 호두를 다시 먹을 수 있었던 시기는
쥐불놀이를 즐기려고 온동네를 뒤져 아기들 분유깡통을 줏으러 다니던 무렵
직접 경운기를 몰고 오신 덕쇠 할아버지께서 호두가 가득들은 가마니를 열고, 올해는 장마 피해가 없어서
호두농사가잘 되었다는 넉넉한 웃음속에 집집마다 표주박으로 호두를 가득가득 퍼서 나눠주시던 그때쯤이였다.
덕분에 해마다 온동네에선 풍요롭게 한식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젠 유년의 페이지 10여년을 넘겨서 훌쩍 어른의 키로 돌아온 그와, 항상 그자리를 지켜 서있는 호두나무 역시 더 아름지게 굵어진 당당함으로 해후를 맞이할때 느껴지던 감동에 한참 그는 호두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하지만 뭘까!
어딘지 모르게 느껴져 오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이 여기 곳곳에 흐리하게 베어 나온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은 뒤따라 배웅나온 덕쇠가 알려왔다.
"어째 많이 심난하지? 울타리도 새로 고치고 나무마다 가지치기 낫질이며, 틈틈이 예초기 들고
잡풀들도 제거좀 해야하는데 내가 많이 게으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채두채 버려지던 집들이 을씨년스레 이농현상이 심각해지더니 결국 부족한
일손을 뒤로하고 호두밭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탓이다.
"작년까지는 그래두 할아버지가 거동하시면서 잠깐씩이라도 손보시고는 했었는데 금년은 이리도
어수선하게 손도 못댄다. 농사일만도 버거우니까, 거기에 우루과이라운든지 뭔지, 같이 품앗이
하는 어르신들 헛농사 짓는다며 한숨 쉬는거 보면 나두 훌쩍 농사일 관둬버릴까 그런다"
결국 방치되어 허전함을 일게하던 호두밭의 진상은 고된 농사일의 푸념아닌 푸념으로 전달되어
꽤 멀리까지 배웅하는 동안 이어진다
"그거 아냐? 모두 다 도시로 떠나버려서 가끔 한번씩 호두서리하러 밤에 찾아오는 얼라들이 요즘
엔 반갑다."
"그만 들어가라 계수씨도 저녁준비하던데 너도 피곤할테고"
"서울서 맻시간씩 걸려 차타고 온 니가 더 피곤하겠지 그래 너두 잘 들어가고
내일 저 아래 OO막걸리집 알지? 연락하면 거게로 와라 너 왔다면 반가워 할 사람들 몇명 데리고
낼 만나자"
녀석.
정말 많이 어른스러워 졌다.
집으로 혼자 되돌아오면서 덕쇠가 남겼던 한마디를 다시 곱씹어 생각하다가
'파아~'
누가보면 미쳤다 생각할 만큼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호두서리하러 밤에 찾아오는 아이들이 반갑다고? 설마....
*********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소녀에게서 읍내로 이사를 간다는 말을 전해들은
소년은 늦은시간까지 이불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사를 간다고? 그러면 얼굴을 볼 수 없는건가?'
어쩌지....
어떻하지....
옆에서 부모님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이불을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덕쇠와 싸우면서 다친 무릎이 아침보다 더 쑤시고 아파 일어나면서 잠깐 신음을 토한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절룩거리는 아픈다리를 이끌고 더듬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소년은 징검다리를 건너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한번씩 구름을 밀쳐내고 빼꼼 내비치는 달빛이 길안내를 해주지만
달빛이 차라리 부담이 된다.
한참을 걸어서 소년이 도착한 곳.
덕쇠할아버지댁 호두나무 숲이였다.
한동안 수풀속 몸을 숨기고 주변을 탐색하면서 하늘을 보았다.
환하게 떠올라 있는 달이 구름속으로 숨어들때까지 긴장감을 진정시키며 기다린다.
잘못 실수라도 해서 걸리는 날이면
그때는 콩밥을 먹어야 하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야 하고
경찰서에 끌려가야 할 판이라 좀체 긴장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이미 소나무 잦나무 도토리나무...
온갖나무를 두루 섭렵해온 타잔의 후예처럼 긍지를 가져온 소년이였지만
오늘만큼은 신중한 모습이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할 행사치레에 또 하나의 난관은 다리의 상처로 더딜 수 밖에
없다는 문제점이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 훌쩍, 아니 더듬더듬 구름이 달빛을 가리우는 타이밍을 맞춰 나무에 오른다.
사각사각사각..
후루루
풀숲을 헤치는 소리,나무를 기어오르는 소리
오늘따라 유난히 더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만약 덕쇠할아버지가
'거 누고?'
후레쉬라도 들고 나오면 모든게 끝장인데...
긴장속에 심장소리까지 쿵,쿵... 방망이질 울려퍼지듯 주변을 폭격해댄다.
겨우 그런대로 지금까지는 되었고
심호흡을 거치면서
찌르르르..
어디에선가 울어대는 풀벌레소리에 맞춰 준비하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힘차게 흔든다.
투둑,투둑, 툭....툭툭
됐다!
최대한 빠르게,최소한 조용히 나무를 내려 주변에 떨어졌을 호두를 더듬더듬 찾아나간다.
주머니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넣고
이정도쯤이면... 나름의 갯수를 가늠한 후 홀연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