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책 산다더니 다 읽었어?"
"아니 아직. 한 반 정도 읽은 거 같아. 참, 그 책 뒤에 작가가 뭐라고 썼는 줄 알아?"
"뭐라고 썼는데?"
"왜 우린 인생의 절반을 연애란 괴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왜 라고 생각해?"
"글쎄. 괴물이라는 표현 자체가 좀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넌?"
"이길 힘이 없어. 마치 내가 높은 성에 갇힌 공주고 아무도 그 성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괴물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간 그 괴물을 물리치고 날 구하러 와 줄 멋진 왕자가 있겠지."
"디즈니 만화 같은데?"
"다들 말은 안하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잖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은 차마 못해도 언젠가 내가 바라던 모습을 가진 남자가 짜잔 하고 나타나기를. 아니야?"
"그래서 넌 어떤 남자가 나타나길 바라는데?"
"문제는 아직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누군가 그랬다. 사랑에 있어서 첫 번째 사람이 평생 사랑하게 될 사람의 기준이 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3년 전 그 사람이 내가 일생동안 하게 될 사랑의 기준이 되는 걸까. 다른 남자를 만나도 첫 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잣대가 되어 그 잣대를 대어보고 플러스와 마이너스 요인을 적절히 따져보고는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여기 저기 둘러보고 아니다 싶어 또 돌아서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까. 결국 그러다 보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겠지. 결코 기준이 되는 그 사람만큼 좋은 사람은 만나지 못 할테니까. 아무 것도, 그 무엇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 채워줄 수 없을 테니까.
현주와 만났던 다음 날 늦은 밤. 재현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 자꾸 조용한 곳을 찾게 된다는 내 말에, 재현은 마침 좋은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벌써 2시간 째. 적당히 마시겠다고 들이켰던 술이 이젠 나를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발그레해져 있었고 알딸딸한 게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듯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재현에게 그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도, 그리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 때도 재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늘어놓는 아픔과 상처와 미련에 대해 그저 그랬었냐며 대답할 뿐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재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 그렇냐고 하면서 누구냐고 물을 것이었다. 그리곤 잘됐으면 좋겠다는 말 또한 잊지 않고 해줄 것이었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게 나을까.
"어제 눈도 오고 해서……."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그랗게 원을 끝없이 그리고 또 그리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눈도 오고 해서?"
"그 앨 만났어."
현실은 늘 상상을 앞지른다고 했다.
그녀. 더 이상 사랑일 수 없다고 했단다. 자기 삶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단다. 그 이후로 재현은 가끔 그녀를 만났다. 그렇게 그 둘이 만날 때, 그 둘은 여느 다른 연인처럼 보였을까? 같이 만나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보였을까? 세상 수많은 커플들이, 드러내지 못하는 진실들을 품고 마주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냥 그저 그들을 '커플'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엮는다.
아차, 싶었다. 그래. 재현에게는 아직 잊지 못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살아 숨쉬는 '그녀' 가 있다는 걸. 왜 이렇게 누군가 옆에서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내 멋대로 잊어버리는 걸까.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렇게 쉽게 잊어버려도 되는 걸까.
다른 이야기를 상상했었다. 어느 날엔가 그녀와 헤어지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했던 날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가슴 속에 별 하나를 품고 산다는 이야기를 했던 날을 떠올리며, 눈이 와서, 그 눈을 맞아서 내가 생각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비록 재현과 내가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사이지만, 어쩌다 가끔씩 그렇게 한 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과 우정 사이에 발 한 짝씩 걸쳐놓고 어중간하게 있는 사이지만, 그래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특별함을 확인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마음을 욕심이라고, 소유욕이라고 얘기했다.
성수에 관한 이상야릇한 마음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 이야기를 해도 좋은 걸까를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재현은 눈이 와서, 그리고 그녀가 생각이 나서 그녀를 만났다고 얘기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과 아무런 수식 없는 말투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랬어?"
"그런데 괜히 만난 거 같아."
"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럼 이제 그만 만나."
"그럼 너도 이제 그만 그 사람 잊어."
얼마 전, '선인장 크래커' 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절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 벌레와 갇힌 공간을 몸서리치도록 두려워하는 모습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푹 빠져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내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는 오랜 시간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별 것 아직 '고작 3년' 이라는 짧은 시간일 것이었다. 그 3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내가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동안 누군가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 했을 것이다. 왜 그만두지 못하냐면서 나를 끝난 사랑을 질질 끄는 철부지쯤으로 보았을 것이다. 내가 돌아서버린 그녀를 향한 재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재현도 내 마음을 100%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그만 만나라는 말을 내뱉을 때, 재현도 쉽게 그 사람을 그만 잊어버리라는 말을 툭 던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술 잔을 들이켰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달콤 쌉싸름 하던 소주가 이제는 투명한 색의 가시가 되어 온 입안을, 온 몸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참, 남이야기 하기는 쉬운 것 같아."
"자기 일이 아니니까."
"전에 영화 안내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분홍 신' 장면 나온 걸 잠깐 봤는데. 김혜수 대사 중에 그런 말이 있었어. 사람은 살면서 상대방을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에 평생 이해할 수 없대."
"응."
"나 얼마 전에 그 사람한테 먼저 연락했어."
"왜?"
"이젠 잊으려고."
"잊으려면 온전하게 잊어야지. 아직도 니가 쓰는 글 구석구석 마다 그 사람이 배어 나오잖아."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떠올릴 기회조차 없어지잖아. 그러면 행복했던 때의 그 사람과 내가 모두 사라지는 거 같아."
"그러면서 무슨 그 사람을 잊겠다고 하는 거야."
"잊을 거야."
재현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재현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의 그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돌풍처럼 다가오더니 이내 돌풍처럼 사라져버렸다. 아니, 밀물 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버렸다고 해야 할까. 한껏 넓고 푸르른 바다를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순간에 물이 쫙 빠져버리더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파도가 거칠게 치고 있었다. 내 발은 질퍽거리는 갯벌에 푹 빠져 있었고, 어디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더 이상 날 사랑할 수 없게 된 것 뿐이라고 했다. 차라리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돼서 그렇다고, 그래서 맘이 변한 거라 말하라고. 그러면 내 속이 좀 편해질까 싶어서 그렇게 시커멓게 타들어간 가슴 속을 보여 가며 외쳐댔다. 그랬더니 그 사람 정말, 나와 헤어지고 곧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더 이상, 사랑을 아니,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변해버리는 사람이라면, 변질되어 버릴 사랑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낯선 감정이라니. 그것도 재현에게가 아닌, 성수에게. 그리고 내가 재현에게 성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지 여부와 성수와의 관계 발전 여부를 떠나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재현이가 말했던 가슴 속에 품은 하나의 별이 사랑이 될 수 있는지.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고 또 그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되더라도 그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어떠한 진실과 어떠한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 같은 별이 될 수 있는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어?"
<내게도 행복한 때는 있었다. -양선미 '차를 타고 안개 속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