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참 세상 일두.... 윤초시댁도 말이 아니게 되었어 그 많던 논이며 밭이며... 다 팔아버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까지 남에손에 넘어가더니만, 악상까지 겹쳐서는 ...." "윤초시어른 증손자라고는 그 기집애 하나 뿐이였지요 아마" "그렇지 사내놈 둘 있던건 어릴적 벌써 떠나 보내고...." "어찌 그리도 자식복이 없는지" "글쎄 말이야. 요 며칠전인가? 기집애가 한참 소나기가 지나가고서는 비에 흠뻑 젖어서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앓던 병이 더 심해진걸 약도 변변히 못 써봤대는거여" "윤초시네두 결국 대가 끊긴 셈이 되었네요" "근데 이번 계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서....글쎄 죽기전에 이런말을 했다는 구만, 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입고있는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말여" ....... 깊어가는 가을.. 소년은 이른시간부터 책가방을 맺다. 오늘 시간표대로 책보를 챙기지도 않았고, 한달남짓 하루 두명씩 돌아오는 학교 당번이 아님에도 이렇게 일찍 학교 등교길이 시작된 적이 없었다. 절기로 추분이 지나고 낮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아직, 아침이라고 하기엔 환하지 않은 시간에 소년은 집을 나섰다. 하지만 소년은 학교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지? '구절초,쑥부쟁이,고들뻬기....' 소나기가 내리던 날 소녀와 함께올라 뛰어놀던 동산에서, 소년은 소녀가 좋아하던 들꽃을 한웅쿰, 한웅쿰.... 한아름 되도록 이리저리 들판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잠시 뒤 소년은 한아름 꽃을 땅바닥에 팽개쳤고 사정없이 발로 밟아 짖이겨 버렸다. 이제 더이상 꽃의 존재를, 꽃의 의미를, 꽃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인식할 안식을 전달해 줄 소녀가 없는것에 대한 분풀이 식으로.... 처음엔 그럴 생각이였다. 마지막 가는길 소녀가 좋아하는 꽃들을 한아름 가득 안고 갈 수 있기를... 그걸 도와주려 아침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고, 이리저리 소녀와 함께놀던 들판엔 이름모를 꽃들이 활짝 피어있을걸 예감했었다. 수소문 하면 소녀의 무덤가는 금새 찾을 수 있을테니까... 정성스레 무덤가에 소녀가 마지막 가는길 꽃으로 수놓을 생각으로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나의 위안밖에 되지않는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눈물이 솟구쳤다. 들판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고 아침 찬서리 가시지 않는 풀섶의 젖은 이슬은 소년의 옷자락을 야금야금 적셔가고 있었다. 집을 일찍 나선 것과는 다르게 등교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지나서였다.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이 사는 작은마을엔 이웃 경조사는 문론 일부러 숨기려는 비밀이 아닌 다음에야 하루가 지나면 모두 소문이 퍼질만큼 담이 없다. 내가 아는것 처럼 다른 친구들도 소녀의 소식을 들은것이 분명하다. 누가와서 놀려대는 녀석들도 없고 눈이라도 마주친다 싶으면 먼저 시선을 피해가면서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 시간표에 맞춰 교과서와 공책을 준비하지 못한걸 알았다. 옆반으로 책을 빌리러 가야한다. 지금 그게, 책이며 공책따위가 그다지도 중요한가?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관둬버렸다. 책이고,공책이고 담임선생님이 뭐라시면 꾸지람 한번 들어버리고 말지 뭐. 모든게 다 귀찮아. 아무 생각도 하기 싫고, 수업도 받기싫고 그냥 이대로 될때로 되라는 심산으로 덕쇠가 날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제까지만도 덕쇠는 나에게 목마르니 물좀 떠오라고 시켰고, 목이 아프니까 환기 시킨다고 창문을 열라는 심부름도 시켰다. 햇빛 들어오니까 커텐을 치라고 시켰고, 수업끝나고 다음수업 대비해서 칠판을 지우라는 자기 할일도 나에게 미뤘었다. "야, 어제 저기 개울가에 물고기어항 던져놓고 왔는데 학교 끝나고 함께 가볼래? 고기 떡밥으로 된장 많이 발라서 고기 함껏 잡혔을걸" 얼마전까지,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급우들 선동해서 나만 따돌림 시켜오던 장본인이 덕쇠였다. 함께 어항놓고, 투망던져서 물고기잡으러 가고 싶어도 한사코 나는 그 패에 곱사리로도 끼워주지 않았던 덕쇠. 그런데 오늘은 내가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가자고 친한척 해보이고 있다. 얄미웠다. 가증스러움, 그러고 나니까 소년은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나보다 덩치도 나보다 키도 나보다 힘도 더 커다란 덕쇠를 상대로 소년은 주먹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또한번 한번, 더 한번... 무겁게 짓누르는 소리없는 교실 분위기와 급우들의 시선은 코피가 터져나온 덕쇠, 그리고 아직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짤딱막하게 외소한 소년에게로 쏠려 있었다. 다음 장면은 모두들 짐작 했으리라... 학교에서도 싸움으로 '짱'먹는 덕쇠의 반격에 소년의 몰골이 어떻게 바뀌어 가게 될 거라는걸. 근데 이상한 일이였다. 찔끔거리면서 덕쇠는 울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 눈물을 억누르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석이면서 자꾸만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는 덕쇠 아침조회를 얼마남겨두지 않은 시간에 덕쇠는 비틀거리며 교실을 튀쳐 나가 버렸다. ........ "거기 빈자리는 누구니?" "......" 누구도 덕쇠라고 호명하지 않았고 책가방이 걸려있는 걸로 봐서 결석이라고 인지하지 않은 선생님은 그대로 조회를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셨다. 1교시. 2교시. 3교시..... 어디를 갔는지 이후로 덕쇠는 다시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종례시간이 되어서야 선생님께서는 무서운 얼굴로 덕쇠의 무단행동에 대한 문책을 예고하시면서 살벌한 교실분위기를 조장하신후 우리반은 하교시간이 되었다. 왠지 하루종일 소년은 덕쇠와의 일로 찜찜한 하루를 보냈다. 수업중에도 덩그라니 책상만 남겨져 있는 덕쇠 자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딴짓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체벌로 몽당분필을 휙 더지시기도 하셨고, 교실 뒤에 가서 서 있으라는 벌을 내리기도 하신다. 그럴때면 반 급우들은 소년의 이러한 수업태도를 두고 더욱 눈치를 보아왔고 숙연함을 잃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다. 오늘 덕쇠의 가방을 집으로 가져다 주는 몫도 소년의 차지였다. 대신 어제까지는 반 강제적이였다면 오늘은 소년의 자발적 선택이였다. '같이가~' 어제까지도 따돌림을 놓던 친구들이 괜스레 어깨동무까지 해오면서 함께 집으로 가자는걸 뿌리치고 오늘도 소년은 축 늘어진 어깨짓으로 터덜터덜 하교길에 올랐다. 그렇게 힘없는 발길로 어느새 소년이 개울가 징검다리에 다다랐을때 '억!' 소년은 심장이 멎을 듯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개울가 한가운데 분홍빛 스웨터, 보조개가 보이는 미소가 너무나도 예쁜, 윤초시댁 손녀가 여느때처럼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
두눈을 질끔 감아버리고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랬다.
요즘 계속되었던 마음을 추수리지 못하고 있었던 현실에 징검다리엔 소녀의 잔상이 나타났을 뿐이였다.
대신 징검다리 한가운데는 소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
맑은물에 손을 담구고 언거푸 얼굴을 훔쳐내기도 하고, 물을타고 노니는 고기를 손으로 잡아보려...
그는 바로 조회시간에 교실을 뛰쳐나간 이후 하루종일 보이지 않았던 덕쇠였다.
"덕쇠야~"
소년이 불렀을때 덕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고 소년과 눈이 마주쳤을땐 이유를 알 수 없이 무슨 나쁜짓 하다
걸린듯, 덕쇠는 소년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그런 덕쇠의 뒷모습만 뻘쭘하게 눈으로 쫓아가기만 할 뿐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한손에 쥐어져 있는 덕쇠의
책가방만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어쩔 수 없이 소년은 책가방을 전해주러 덕쇠의 집을 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황당이 보이는 곳
곧장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벗어나 소년은 덕쇠네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쯤, 소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기시감(旣視感)
언젠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덕쇠처럼 나에게도 엇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바보~'
소녀가 그렇게 외치며 나를향해 얼마 날아가지도 못할 조약돌을 던진 다음날
항상 소녀가 앉아있었던 그 자리에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싫어 냇물에 얼굴을 훔쳐내고
소녀가 그러던 것처럼 나역시도 손살같이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아보려 물속에 손을 담가 휘저어보곤 하다가는
저 건너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았을 소녀가 징검다리를 건너 다가오고 있을때 느껴졌던 부끄러움으로 반대쪽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뜀박질로 도망치던.....
덕쇠는 집으로 돌아와 있지 않았다.
소년은 대청마루 구석진 곳에 가방을 놓아두고 다시 왔던길을 따라서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덕쇠가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다다음날
오늘도 역시 등교하지 않았다.
빈책상만 덩그라니 덕쇠의 빈자리에 소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3일째날에도 덕쇠는 등교하지 않았고
선생님께서는 덕쇠네 집을 아는사람이 있냐며 조회시간 반 급우들에게 질문을 해 왔다.
그리고 누군가 손을 번쩍들고
옆마을 동산 어귀에서 덕쇠를 봤다는 친구가 있었고
읍내 어디쯤에서 덕쇠를 보고 불렀는데 막 도망가더라는 말도 했다.
어디가 아파서 장기결석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듯 했다.
오늘 한번 덕쇠네 집으로 가봐야 할까?
소년은 덕쇠의 결석이유가 자기와도 결부되어 있는 자책감에 마음이 좀 그러하다.
4일째 되는날
덕쇠가 등교했다.
언제나 그렇듯 조회전에 왁자지껄 거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뒷문이 드륵 열리며 덕쇠가 들어섰다.
일순간 교실은 조용해졌고 아무일 없었던 듯 덕쇠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 누구도 그동안 왜 결석했냐는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이 없다.
또한 다른 어떤누구 못지않게 활달하던 덕쇠도 조용하게 자리에 앉아 1교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든 이상의 불필요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 친구들은 모두 걱정이다.
요 며칠간 담임선생님은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었다.
아침조회가 시작되고 선생님은 여느때처럼 1번부터 출석을 체크하신다.
'00번 X덕쇠' 부르셨을때
'네~' 하는 소리가 들리자 출석부만 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곧, 고개를 들어 덕쇠를 쳐다보셨다.
그 눈빛은.... 숨이 막힐 듯.....
"덕쇠 너 일로 나와 봐"
더이상의 출석체크는 없었다.
교탁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는 덕쇠.
그동안 선생님은 입고 있던 웃옷 윗단추 하나와 손목시계를 풀고 계셨다.
학생들에게 엄하게 회초리를 들때의 전형적인 선생님의 행동이다.
"엎쳐!"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다. 긴장감속에 선생님께서 말문을 연다. "그동안 왜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고, 또 무단결석을 했던거냐" 합당한 이유가 없을시엔 선생님의 회초리가 불을 뿜을게 뻔했다. 제발제발..... 소년은 덕쇠의 위기가 결코 자신과는 무관하지 않음을 알기에 더욱 긴장감이 더해갔다. "......" 덕쇠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척~, 척~, 척~...' 선생님의 회초리가 덕쇠의 허벅지에 내리꽂힌다. 소년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반친구들도 모두 묵묵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더러 여학생들은 무서움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벌을 감수하는 덕쇠만은 달랐다. 입술을 굳게 깨물고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어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척~,척~. 처------ㄱ' "ㅇ덕쇠" "예~" "일어서" 일단 선생님의 체벌이 멈췄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로의 대답이 이어지지 않았을때에는 금방의 것보다 더한 체벌을 덕쇠는 감수해야 할것이다. 덕쇠는 무슨말을 할까? 차라리 핑계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아팠다고, 식구들하고 갑자기 멀리 친척집에 갔다왔다고 하다못해 그런게 아니라면 산에 놀러갔다가 간첩에게 납치라도 되었었다고... 정말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그런 핑계라도 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한 우리들의 기도가 덕쇠에게 닿았을까? 선생님의 제차 질문에 덕쇠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의 대답을 입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저기...저, 선생님... 있잖아요오~ 우리집 소가 얼마전에 새끼를 낳는데요오~ 우리 아부지가요오~ 집에서 키우는 소가 새끼를 낳고나서 사람들 만나고, 그러면.... 부정타서 소 새끼가 죽는다고.... 그래서요오~ 아버지가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해가지고......" "........!!!" 크극...큭...큭.... 어느새 무겁게 짖누르던 교실의 먹구름은 밝은 햇살에 걷히듯,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입밖으로 쉬쉬 세어나오고 있었다. 선생님도 어이가 없는지 긴 한숨을 한번 크게 토해내셨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덕쇠네 집에서 키우는 소는 모두 황소이고 그나마 암소라고는 아직 성인식(?)을 치루려면 한참 먼, 코뚜레도 끼우기전의 암송아지 한마리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