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늦을 것 같아.”
“얼마나?”
“한 3,40분쯤?”
“그래?”
“너 지금 어딘데? 도착했어?”
“난 아까 왔지.”
“그래? 일이 늦어질 것 같네. 미안.”
“뭐 그럼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 있지 뭐.”
“그래, 오늘 내가 밥 살게. 좀만 기다려.”
“응.”
유독 햇살과 바람 모두 포근한 날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롱 코트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가 무색할 만큼. 강남이긴 했지만 토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길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이 거리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면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할 정도로 북적거리겠지.
누군가를 기다리기 딱 좋은 강남역 6번 출구 외환은행 앞.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김동률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현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이 있다고 하더니, 혹시나 못 일어난 건 아닐까, 아니면 일이 길어지는 건가,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리곤 현주에게 좀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외환은행 바로 옆에는 10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서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와 함께 뭔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 오늘이 삼일절이었지. 그제야 오늘이 단순한 토요일이 아닌 삼일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불편한 눈치였다. 몇 미터 안 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니 말이다. 나 역시 그들을 의식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숙이고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늘 좋은 일이기만 할까. 자신있게 나는 이렇노라고, 우리는 이렇노라고. 어떠한 진실과 어떠한 상황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당당함이 될 수도 있고 뻔뻔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뭔가 아이러니했다.
한산한 거리만큼이나 스타벅스 안은 고작 한 테이블이 차 있을 뿐이었다.
“어서오세요. 스타벅스입니다.”
뭔가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집의 남자가 유리창을 닦다말고 나를 반겼다.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주세요.”
“사이즈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란데 주세요.”
“일회용 잔이랑 머그잔 중에 어떤 걸로 드릴까요?”
“머그잔에 주세요. 아, 초콜렛 무스 케익도 주세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겨우 물 한 잔 마시고 나왔더니 배가 고팠다. 카라멜 마끼아또도 만만치 않게 단데 거기다가 초콜렛 무스 케익이라니. 기분 전환하기에는 최고의 선택인 듯 싶었다. 쟁반에 커피와 케익을 담아 받쳐들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자리로 갔다. 코트를 풀어헤치고 포크로 케익을 뚝 잘라 한 입 가득 넣었다. 입 안 한 가득 달콤함이 퍼져들었다. 그리고 카라멜 마끼아또 한 모금. 정말 달다.
예상치 못한 혼자만의 시간. 책이라도 들고 와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의 동생과 떠나다.’ 얼마 전, 서점에 들러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의 동생과 떠난다니. 도대체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제목 자체부터 불륜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의 동생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걸까, 결국엔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는 걸까. 책 제목도 제목이었지만, 책의 겉표지에 쓰여 있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왜 우린 인생의 절반을 연애란 괴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그러게. 그 질문을 10명에게 묻는다면 각기 다른 10가지의 대답이 나올 것만 같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은 걸까? 그 괴물을 이길 힘이 없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는 소심하고 용기 없는 대답을 해야 옳은 걸까. 노래나 들으면서 책을 읽으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가 스타벅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소리와 겹쳐 이내 이어폰을 빼버렸다.
‘누군가와 팝콘을 먹는다는 것.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팝콘을 당연한 듯 나누는 것. 연애란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듯 이 자잘한 공식에 대입하여 엉킨 타래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상대를 힐끗거리며 느끼는 조바심. 유치하지만 이것을 되풀이하며 과거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지 않는 게 연애의 공식일 것이다.’
책의 한 부분을 읽으면서, 팝콘과 연애와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재현이 영화를 보자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알고 지낸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그와는 단 한 번도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친구로 만났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와 밥 먹은 기억조차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다 술이었다. 어느 날인가, 단 둘이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술 한 잔 들어가지 않은 맨 정신으로 그와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내가 있지 말았어야 할 자리에 앉아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어땠을까? 아무렇지 않았을까? 나만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까?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크게 탁 트인 유리창 밖으로 다정하게 손을 잡은 연인들이 오고 가고, 근처 학원을 다니는 듯 한 사람들이 파일을 들고 바쁘게 걸어갔다.
현주는 언제쯤 오려나. 3,40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지만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늘 바쁘게 일하는 현주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집에 가겠다며 다음에 만나자고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따라 현주를 못 만나게 되도, 그냥 이렇게 한 두시간쯤 스타벅스에 앉아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 기운을 느껴서일까.
“어디야?”
“끝났어? 여기 스타벅스. 커피랑 케익 좀 많이 남았는데, 니가 그냥 여기로 올래?”
“응, 알았어.”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뛰어 들어오는 현주가 보였다. 현주는 한 달 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뭔가 현주는 변화라는 단어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도록,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투명 수채화 같은 사람.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러한 판단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일까.
“일이 많았나봐?”
“응, 좀 그렇게 됐네.”
“뭐 마실래?”
“아니, 나 커피 마시고 왔어. 너 다 마시면 밥 먹으러 가자.”
“그래.”
“어제 친구들은 잘 만났어?”
“그냥 그렇지 뭐. 이런 저런 얘기. 요새는 어디 시끄러운데서 술 먹기도 싫더라.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안주 3개에 12000원하는 술집만 찾아다녔는데 이젠 일본식 선술집만 찾게 돼. 단 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뭔가 알딸딸하게 취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술집.”
“나이 먹나보다 우리. 나도 요새 그래. 사람 많은 곳은 뭔가 정신이 없어.”
“응.”
“오늘 날씨 정말 좋은 거 같아. 놀러가기 딱이다 정말.”
“그러게, 화창하고 바람도 이젠 제법 따뜻한 거 같아.”
“응.”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같아.”
<엄밀히 말해 인간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법이다. -봄로야 ‘선인장 크래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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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오랜만에 쓰는 글 같네요.
사실 이러다가, 또 그만둘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생기네요.
열심히 써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