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단순한 말이 가지는 현상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경박한 의미로 남거나 기꺼이 소멸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생의 전반을 관통하며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이 될 수도 있는 말, 희망과 배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독한 진실 혹은 카모플라쥬다. 영속성을 가진 것들 중에 가장 영원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가장 짧은 시효성을 지니고 있는 심정의 유기적인 발화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세상을 가진 듯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슬픔의 강에 목이 잠기기도 하니 과연 사랑한다는 고백은 유의한가. 물론 '사랑해'에 대한 신뢰나 의구심이 모든 '사랑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동류同類라고 믿는 사람 하나를 향해, 또는 어떤 가치나 식물을 향해 우리가 '사랑해' 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남자가, 연애의 교각 위에 서있을 때 생겨난다. 누구누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 누구누군 결국 헤어졌다는군, 모든 사랑에는 결론의 형식이 있다. 그러니까 누구와 누군 헤어지긴 했지만 오래오래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대, 식의 응용이나 레토릭은 잠시 접어 두자. 사랑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보면 모든 연애가 아름다울 수 없다는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의 기질이나 관점에 따라 감정적 유희에 머무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주가 섞인 채 종결되기도 하며 더러는 훗날까지 두고두고 되새겨질 통증의 흔적으로 남기도 한다. 사랑에 근접한 감정의 자극적인 긴장을 즐기는 것은 측은한 욕망이다. 사랑조차 욕망일 때, 그 대상을 얻게 되면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변덕스런 욕망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대문을 나선다. 허나 순간의 사랑도, 그 때 그 시간의 사랑도, 뒤집어 보면 '사랑해'란 말은 들어있다. 이 허탄한 현상, 달콤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쓸쓸한 감정의 헛방, 그러니까 마침내 그 사랑의 끝에 깔끔하게 안녕, 이란 없는 것이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묵직하게 사랑을 속에 담아두고 있을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그렇다고 사랑해, 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 듬직한 침묵이 연애의 완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에는 '사랑과 혁명, 젊은이들이 삶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뿐이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사랑과 혁명을 향한 에너지가 능히 죽음과 교환될 만한 등가적 가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애초의 사랑이라는 것은 타당한 지지에서 출발하여 전폭적인 밀착에 이르게 되는 틈 없는 소통이며 일종의 초월성마저 지니고 있는 교감과 다름 아니다. 마침내 참았던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사랑해' 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 상대를 향한 모든 간절함을 상정한 것이며 스스로의 마음에 각별함의 화인을 찍는 일이다. 간혹 애정함량에 대해 교환이나 보상의지가 섞이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은연중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일 또한 살갑고도 순정한 애교가 분명하다. 온전히 '사랑해' 라고 말하고 '사랑해' 라는 말을 듣는 일, 간결하게 전부를 타전하는 모스 부호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