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멍히 거리에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냥 지켜본다. 다양한 헤어스타일과 다양한 동작들과 다양한 외침들과 또 다양한... 그 다양한 어떤 것들...다양한...
어느 순간 일상에 조금은 지루해 가기도 한다. 저기 바삐 가는 사람들은 내가 이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사람들은 항상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첫인상이란 참 묘하고 신기한 것이다. 사람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 눈속에 제 멋대로 박아 놓으니 말이다. 말했듯이 난 일상에 지루해 가고 있었다.
지루함을 느끼고는 나는 일어난다. 걷는다. 난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걷는다는 건 내가 살아있음을 재확인 시켜준다. 조금 오래 걷다보면 거칠어진 호흡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나는 확인하고 헤헤-하고 바보스런 웃음을 짓곤 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의 그 숨소리처럼 걷고 난뒤의 내 호흡은 거칠다.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죽음이란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느낌이 묘하다.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몰라서 울수 없었다. 가여운 그 노인네의 죽음 앞에서 나는 울어드리질 못했다. 가여운 우리 할머니를 위해 울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부엌에 달린 작은 방에서 홀로 계신 증조할머니의 방을 빼꼼히 들여다 보면 할머니께서는 주름을 가득 접어 웃으셨다. 어린 마음에 난 할머니가 무섭기도 했다. 할머니의 목에는 테니스 공만한 혹이 있으셨다. 다들 그래서 할머니를 싫어 했다.. 내동생은 그런거 모른다. 쪼르르 들어간다. 할머니-할머니- 동생은 할머니 옆에 가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잔다. 할머니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동생이 잠들고 나서 나는 슬그머니 할머니 방에 들어선다. 어이구 우리 맏이- 사탕주련?
어찌 생각해보면 나는 그적부터 사탕을 좋아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사탕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너무 좋아한다. 중독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를 아득하게 잡아 이끌고는 묘한 행복을 안겨 준다... 사탕을 입에 넣고 그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치과에 간다. 치과는 내게 치명적인 곳이다. 병원 안에 울리는 그 '무서운 소리'에 나는 썩은 이를 치료하는데 상당한 고민을 하게된다. 사탕을 그만 먹어도 될 나이인데 나는 사탕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나는 사탕을 좋아한다.
할머니 방에 들어온 나는 방을 둘러본다. 천으로 만든 그 70년대 옷을 넣어두는 지퍼달린 가구. 그리고 농이 하나. 그리고 80년대식 돌려가며 채널을 돌리는 TV. 따스한 기운. 그리고 늙은이의 그 알수 없는 쾌쾌한 내음. 싫지않다.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이불 아래서 꺼내신다. 아...진득진득하게 녹은 사탕. 그래도 나는 그 사탕이 제일 좋다. 좋기만 하다. 난 손에 붙어버린 사탕의 일부까지 쪽쪽 빨아 먹는다. 할머니는 다 빠져서 보기에 흉한 이를 드러니고 또 예의 그 주름진 웃음을 지어보이신다.
길을 걸으며 나는 쇼윈도의 대형 TV화면에 나오는 어느 할머니의 웃음을 보며 우리 할머니의 그 웃음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카메라를 향한 웃음과 손녀에게 향한 웃음은 말 할 수 없는 뭉클함에서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난 그 말 할 수 없는 뭉클함을 동경한다. 어린시절의 내가 부럽다. 지금 살아계신 친할머니의 웃음보다 나는 내게 녹아내린 사탕을 내밀며 웃으시는 그 증조할머니의 주름진 미소를 더욱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그림움을 가진 악독한 놈이다..
얘- 할머니가 나를 부르신다. 네? 내가 대답한다. 얘, 나 머리좀 깍게 미용실 좀 데려다 주련? 응?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솔직히 싫다. 나는 뛰어가면 5분 거리인 미용실이 할머니의 걸음으로는 15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기때문이다. 나는 계산력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계산력이 생활에 적용 될만큼 융통성 있는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난 할머니 팔을 잡아 부축하고는 할머니와 함께 내게는 5분 걸리는 할머니의 15분, 왕래로 30분, 머리 깍는데까지 1시간 30분의 외출에 나선다.
이번에 새로 생긴 미용실 앞을 지나려 보니 창가에 내 머리가 무척이나 길어보였다. 나는 입을 삐죽 거리고는 미용실에 들어간다. 걷기를 멈추고 미용실에 들어선다. 조금만 잘라주세요- 내 부탁에 파란머리의 미용사는 네네-하며 껌을 쫙쫙 씹는다. 내 머리가 잘려나간다.
할머니의 그 짧은 머리가 더 짧게 잘려나간다. 거울속의 할머니의 머리가 잘려나간다.
짧아진 내 머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머리에 어울리게 어색하게 웃고 돈을 내고는 그냥 나왔다. 또 걷는다. 걷는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할머니의 1시간 30분의 외출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힘들기만 하다. 그래도 난 약20분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때는 오르막 길어서 그런지 예상의1시간 30분 외출이 5분 더 연장되었기 때문에 20분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이제 집에 왔는데... 얘, 나 좀 씻어야 겠다. 난 조금 짜증이 난다. 하지만 엄마가 신신당부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나는 할머니를 욕실로 모시고 간다. 할머니가 들어가시고 혼자 씻으시겠다고 하신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아 드린다. 때마침 엄마가 돌아오셨다. 별일 없었지? 내가 대답하려는 순간 욕실에서 쿠당하는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데 나는 더럭 겁이 난다.
할머니-!!! 엄마의 목소리가 집안 구석구석 울려 내 귓바퀴에 맴돈다. 겁이 난다.
걷다보니 벌써 우리집 골목이네. 힘들다. 하악하악- 시간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이놈의 언덕은 여전히 높다.
밤이다. 오촌할아버지에서부터 왕고모할머니, 고모들, 작은아버지, 그리고 늦게 들어오신다던 아빠. 오늘은 마치 설같다. 설이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 우리집이다. 우리집은 큰집이니까. 하지만 어른들 말씀에는 서로들 툴툴거리는 말투뿐이다.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이제 됐지뭐- 라는 말에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모른다. 아 , 바보 같다. 우리 선생님은 내가 똑똑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바보같다. 무슨 소리지? 그때 엄마가 할머니 손을 잡고는, 힘겨워 하시는 할머니 손을 잡고 기도 하시고는 말씀하신다. 천국 가셔야죠-하나님 믿고 천국 가셔야죠- 하신다. 왕고모할머니가 소리치신다. 천국은 무슨 천국이야! 극락 왕생하쇼 할머니!! 왕고모할머니는 무당이시다. 하지만 나는 교회에 간다. 난 왕고모할머니가 싫다. 저 귀걸이와 무거워 보이는 반지와 그리고 극락 왕생하라는 말투가 싫다. 왕고모 할머니가 뭐라시든 증조할머니는 힘겹게 엄마에게 말씀하신다. 아가, 새아가, 나 예수믿으마 예수믿고 천국가마- 할머니와 엄마가 기도하신다. 밤이 깊어간다. 졸리다.
집앞이다. 걸어서 도착지까지 왔는데 너무 아쉽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자려는 나를 고모가 붙잡아 안방에서 재운다. 동생들이 자고 있는 옆에서. 그래서 잔다.
문앞이다. 벨을 누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른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난 며칠간 학교에가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집앞은 손님이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모두들 검은 옷을 입고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어머니- 하시며 우신다.
누구세요?
네-저예요-
며칠이 지난뒤 누군가 새벽에 나를 깨운다. 나는 너무 피곤하다. 고모인가보다. 큰고모다. 큰고모는 나를 흔들어 깨워 밖으로 몰아 세운다. 졸린데... 밖에 가족들이 다 나와 있다. 그냥 서있는다. 할머니 잘 가세요- 아빠가 말한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가 없음을 안다. 가슴이 뭉클하다..
띡-하고 문이 열린다. 이제 집에 들어가 쉬어야지. 걷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나는 항상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때마다 걷는다. 학교도 걸어서 가고 교회도 걸어서 가고, 나는 항상 걷는다. 걷는 것은 행복하다. 나는 아직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걷는 것이 좋을뿐이다. 걸으면서 나는 살아 있음을 확인해본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면 나는 너무 행복하다. 우리 할머니 심장소리 같아서 말이다... 내가 부축해드릴때- 그때 나를 위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쉬면서도 길을 재촉하셨던 할머니의 그 발걸음처럼 내 발걸음도 그리 걷는다. 나는 걸을때 이 거친 숨소리가 좋다. 누군가에게도 내 그 거친 숨소리를 자랑하고픈 월요일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