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중화장실을 잘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이 앉았던 변기에서 일을 본다는 것이_. 위생관념이 그리 철저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찝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디 배설이 맘먹은 대로 조절이 되는 일이던가!! 어쩔 수 없이 공중화장실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근데 주로 우리가 이용하게 되는 공중화장실이란게 뻔하다. 지하철이나 버스터미널의 화장실이나, 백화점이나 가게들의 화장실, 학교화장실, 회사 화장실 정도가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중 지하철이나 터미널의 화장실은 예전에는 퍽이나 지저분했는데, 요즘은 깨끗하다 못해 거기서 누워 잘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다.(월드컵때문인가?) 백화점이나 가게들의 화장실이 깨끗한 건 당연한 일... 남의 돈 먹어야 하는 사람들인만큼 사소한 거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화장실 위생에 신경쓰는 건 당연지사다.
학교 화장실도 무척이나 깨끗해졌다. 아무리 화장실가는 걸 뒷일이라고 표현할만큼 그리 정결한 행위는 아닐지라도, 요즘은 화장실에 가면 그 쾌적함에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나는 학교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광경을 봤다. 변기 화장실 칸의 4면 중에 3면이 다양한 벽화들과, 서사시들로 가득한 것이 아닌가!!! 벽화의 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서사시들의 내용이 여타 작품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앗싸.... 왠지 횡재를 한 기분이다. 사실 문화인다운 화장실쓰기를 운운하면 화장실 낙서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좀처럼 찾아다니기 전에는 볼 수 없던 화장실 낙서들을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낙서가 아무리 지저분하고, 저속하고, 불온하고, 음란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엔 살아있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내 속의 것을 아무 조건없이 까발릴 수 있는 절대자유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화장실낙서이기에, 거기엔 평상시에는 입밖으로 담아내지 못할 절대적인 자기모순의 모습과 순결한 성적 판타지가 존재한다. 거기엔 이성을 넘어, 관습을 넘어,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 휩쓸리는 타락의 새빨간 쾌락이 존재한다.
거기엔 선에 대한 의무감을 벗어던진, 악마적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인간 본연의 원죄가 활개치며, 거기엔 자기 자신도 놀라는 독단과 선입견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는 독재가가 논평하는 멸망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한 저속함과 비도덕성 투성이 세상이건만, 그 속에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과 가슴약한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생명력이 있다.
이렇게 화장실은 단순한 육체적 배설장소가 아니라, 정신적 배설장소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 속의 것을 쏟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화장실에서의 낙서는 또 하나의 복음이다.
이런 화장실낙서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의식해서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화장실낙서의 무분별성과 대책없는 방종에도 불구하고, 모든 화장실낙서는 결국 공유되어지고, 함께 논의되어지기를 스스로 희망한다. 거기엔 인생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해답이 존재하고, 성적 판타지의 끝에 대한 여러 경험자와 몽상가의 비책이 용쟁호투격으로 난무한다.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차가운 비난과 그에 대한 우스운 동조나 핏대 선 옹호가 머리터질만큼 치열하게 공존한다.
개개인이 써낸 화장실낙서들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받는다. 이 시끌벅적한 소음속에서 화장실 이용자 또한 자신의 가슴 한편에 접어두었던 뱀의 소리, 악마의 속삭임을 직접 제 손으로 옮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펜을 들고, 맞춤법, 문법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상을 토해놓는다. 그리고 배설의 기쁨에 몸을 떨게 된다. 배설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다. 따라서 육체적 배설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배설도 엄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화장실낙서를 무조건적으로 비속하고, 열등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단정짓는 사람들에게 야유를 보낸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화장실낙서를 허용해달랄 수는 없다. 만약 앞에서 말한 인문대 화장실 변기칸에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이 여린 초등학생이 들어갔다고 치자. 그 학생이 그 벽화와 서사시를 보고 받을 정신적 충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배설의 권리가 인정받아야 하는 만큼, 그 배설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화장실낙서를 반문화적인 행동으로 낙인찍는 것은 막아야 한다. 화장실낙서만큼 문화적인 행동이 어디 있는가?
화장실낙서만큼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정보와 고민,그리고 답변이 존재하는 의견교류의 장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화장실낙서의 저속함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인터넷 또한 얼마나 저속한가를 말하고 싶다. 아이디를 숨기거나 위조할 수 있고, 아이피 추적이 되지 않는 상태의 익명성 보장 상태에서, 인터넷 이용자가 보이는 작태는 정말 아니올시다 이다. 적어도 화장실낙서는 특정개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별로 없는 반면, 인터넷은 특정개인은 물론 접속중인 모든 이용자들 상대로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 혹 화장실낙서의 익명성이 네트워크화를 통해 인터넷으로 발전된 것이므로, 인터넷의 익명성과 화장실낙서의 익명성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화장실낙서가 일차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이차적으로 다른 낙서들과 교류하는 것임에 비해, 인터넷에서는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접근하고자하는 의도가 앞설수 있으므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의 인식상태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은데, 결론은 이런거다. 화장실낙서는 거짓없는 살아있는 인간 본성의 표출이기에 이를 권위적인 도덕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화장실낙서의 본연의 기능에 걸맞는 권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모든 화장실에서의 낙서 합법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억지로 억제시키려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모토가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고, 평등하게 평가받을 수 기회를 준다는 것 아닌가? 시장경제원리에 비추어서도 결국 화장실낙서에 대한 피해가 속출하다보면자연히 도태될 것이 아닌가!!
무조건적으로 화장실낙서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한 번 화장실낙서들을 읽어보고 정말 그 내용이 단지 저속한 것인지, 혹 거기에서 우리의 억압된 자아들을 해방시켜줄 카타르시스가 존재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