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했다.
처음해 보는것도 아니기에 평소에 갈증이 느껴지면 물을 마시듯,
저녁이 되면 말없이 자동적으로 밥을 하던 나의 습관처럼
무심히 수세미를 들게 되었다.
부모님은 어느땐가부터 일을 하시게 되었다. ..
현대에선 이것을 맞벌이라 부른다.
처음부터 맞벌이를 하게 되신건 아닌데...
세상사 살아가는 것이 다 그렇듯, 사람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 일을 하게 마련이다.
그중 우리 가족이 포함된 것이랄까...
좀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왜 내가 지금 싱크대 앞에서 수세미를 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답은 앞에서 말한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써 여자라는,
또는 누나라는 이름으로,
딸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수세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게 한다.
그리고 당연히 방학중이기 때문에 집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역할 대신으로
이것 저것 하는 일이 많다.
청소, 빨래, 집안 정리, 화초관리 등등...
그러니까, 설거지와 같은 쉬운 일은 동생이라는 손이 거들어 주면 좋으련만.
어느날인가, 하늘이 꾸르륵 안색이 나빠지더니 비가 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싱크대에 가득 한 그릇들이 그렇게 보기 싫어서,
음식조각 냄새들이 싫어서
'오늘 하루만 누나 대신 설거지좀 해줘'라고 말했다.
그런 동생은 '대신 설거지 좀 해 주면 좋겠어'라는 나의 눈빛을
한마디로 묵살시켜버렸다.
애초애 기대를 한게 잘못이였을까?
"누나가 해! 누나잖아! 나는 남자니까 그런거 안해! 여자가 해야지!"
.....난 여자다.
그리고 한 가정안에서 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자라서 여자니까 이런일을 해야한다는 투의 말투는 정말!
싫다는걸 새삼 느꼈다.
하긴 그 날은 비도 왔었고 나도 하기 싫었는데
동생이라고 설거지가 하고싶었을까 싶지만..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뒤 거칠게 벗어놓은 고무장갑을 끼고
어느새 세재 거품이 튄 코 끝을 문지르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
엉망이 된 표정으로 비누 거품을 거칠게 움켜쥐고
접시를 박박 문질러대는 모습을 봤을땐..
내가 봐도 참 한심했다.
또, 나는 여자고 동생보다 크니까 이정도 쯤은 내가 해야지 해도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나는 동생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인다.
설거지라는 공동의 과제를 놓고.
결과는 나의 깨끗한 패배.
동생의 깔끔한 한판승.
"왜 여자만 설거지 해야되!"라는 나의 칼은
"난 남자야! 그리고 나는 동생인걸? "이라는 방패앞에 막혀버린다.
의미없는 싸움.
이렇게 지내온 날들이 하루하루 전쟁 같이 느껴질때가 많다.
하지만 꼭 그런건 아니까.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과 깨끗한 싱크대를 보았을 때
느끼는 상쾌함은 설거지를 하면서 느꼈던 불쾌감을 일시에 해소시켜 주니까.
이런 감정들 마저 없었다면 설거지고 뭐고 다 엎어버렸을 지도.
난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내가 쓴 글을 읽고
"글이 이게 뭐야! 진짜 못썼네."는 둘째치고
"설거지가 뭐가 대수라고 저 난리야! 집안에서 큰딸이면 지가 하는거지"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시다면 오늘 당장 집에가서 아내대신,
혹은 학교 또는 학교와 학원을 갔다와서 설거지를 하는 딸을 대신해서
하루라도 직접 해 보길.
참고로 [설거지량=불쾌감->뿌듯함]은 비례한다고 충고해 드리고 싶다.
이런 나의 주장에 힘입어 요새는 아버지께서도 틈이 나시면
손수 설거지를 하신다.
그래서일까.
가끔 보게 되는 아버지의 설거지하는 모습은,
내 삶의 작은 충격이 되어 가습속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이상 여기까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끝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은 다시 읽어보지 않는 나의 괴상한 버릇 때문에
사실 지금도 조금 불안하다.
말도 안되게 썼겠지, 하고. 이러고 보니 나도 은근히 쌓인게 많았나보다.
쉼 없이 이렇게 써 내려간걸 보면 말이다.
오늘도 그때처럼 바깥에 비가 온다.
그리고 그날처럼 드잡이질 할 사람도 없다.
모두 집지키는 나를 두고 낚시를 갔기 때문.
사실 비가 와서 낚시는 뒷전이고 차를 타기 싫어하는 나를 빼놓고
어디 외각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조용한 집 분위기가 너무 좋다.
그리고 설거지 할 것이 없는 싱크대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이만 책이나 읽으려 가야겠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