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 가득히 겨울을 알리는 포스터와 함께 스키장캠프에 관한 소개와 스키구매에 관한 기사가 너저분하게 흐른다. 불현듯 스키가 사고 싶어진다. 별로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체의 유혹에 무릎을 꿇고 싶어진다. 3년전, 어렵사리 등산화와 등산가방을 비롯하여 등산장비를 무더기로 구입했었다. 타 매장보다는 가격이 싸다는 모메이커 할인매장을 일부러 가서 구매했다. 내일 당장 산에 오를 것도 아니면서 그 주 내내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난 그렇게 구매 유혹에 무방비상태에 놓여있다.
스키와 등산장비를 비롯하여 나는 하루 24시간 내내 충동구매에 시달린다. 길가다 풍기는 떡볶이나 튀김종류의 분식가게를 지나칠 때면 먹고싶다는 충동이 가슴 깊은 곳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오고, \"망했습니다\"라며 \"폭탄세일\", \"거저 드립니다\"라는 광고물을 오랜 시간 서서 읽어보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인터넷쇼핑으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가 취소버튼을 단 한 번 누름으로 모아두었던 상품들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난 원하는 것이 참 많다. 물질적으로는 겨울용 등산장비를 갖고 싶고, 개인 낚시가방도 소장하고 싶다. 그리고 조그마한 책꽂이가 탐이 나고 실감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커다란 TV도 갖고 싶다. 또한 집안에서도 운동할 수 있는 런닝머신을 사고 싶고, 나의 방 한 구석에 예쁘장한 스탠드바도 만들고 싶다. 구닥다리 핸드폰을 최신형 스카이폴더로 교체하고 싶고 기분에 따라 골라 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들과 신발 및 액세서리들이 내 옷장 속에서 즐비하게 나를 기다리게 하고 싶다.
그리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원하기도 한다. 언제든지 내 옆에서 재갈거리며 웃어주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고 천진하게 미소짓는 천사 같은 어린이가 내 옆에서 잠들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조디포스터와 하루동안 데이트도 하고 싶고, 명배우 율브리너와 리버피닉스에게 왜 그렇게 빨리 죽었느냐고 따지고 싶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처럼 슬프지만 이쁜사랑을 하고 싶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도록 큐피드의 화살을 훔쳐와서 여기저기 마구 쏘아보고 싶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슈퍼맨이 된 것처럼 두 팔을 힘껏 벌리고 뛰어내려보고 싶고 하루종일 나를 짜증나게 하는 직장상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어릴 적부터 갖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아주 간절히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있을는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갖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두꺼운 힘줄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버지의 손이다.
아버지는 장사를 하셨다. 학교에서 부모의 직업을 쓰라고 하면 \"상업\"이라고 쓰곤 했다. 다른 집의 아버지들처럼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어서 방학중에는 하루종일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장사를 하시다 피곤하시면 어머니와 교대를 하시고 집으로 들어와 한 숨 주무시기도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단순히 아버지일 뿐이었다. 나를 낳아주고 나를 길러주신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이후로 아버지는 영원한 나의 우상이 되었고 장차 내가 닮아가야 할 대상이 되었으며 평생 잊지 못할 향수를 느끼게 되었다.
피곤에 지친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와 누우셨다. 방학중이던 나는 슬그머니 아버지 옆으로 가서 누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커다란 팔을 끌어내려 베개로 삼았다.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아버지 또한 당신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아들이 싫지는 않으셨지는 당신 가슴속으로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잠이 드셨다. 아버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언제나 무서움의 대상이었었는데 잠이 드신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막 빨갛게 익어갈 것 같은 사과 같았다.
냄새가 났다. 아니 향수였다. 아버지에게서만 나는 세계 유일의 냄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옷을 갈아입다가 킁킁거리면 나의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나던 그 냄새는 없다. 담배냄새같기도 하고 땀냄새같기도하고 여하튼 오랫동안 숙성된 풋풋하고 은은하며 감미롭게 휘어 돌아가는 무지개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커다랗고 무뚝뚝한 손이다. 약간의 털도 올라있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힘줄의 박동이 느껴지는 손이다. 부러웠다. 아버지의 손을 갖고 싶었다. 아니 나의 조그만 손이 아버지의 손처럼 바뀌기를 기도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이런 손을 가질 수 있을까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아버지의 손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닮은 곳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닮은 곳을 찾아내었다. 아버지의 중지손가락과 나의 중지손가락이 닮았던 것이다. 나의 중지손가락 손톱의 일부분은 모가 난 듯이 꺽여있었는데 아버지의 중지손가락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나는 친구들과 만나면 손톱도 유전이라며 우기곤 했다. 지금도 술에 취하면 가끔씩 그렇게 말한다. 손톱이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이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것과 내 것이 같다는 것뿐이다.
어른이 되버린 지금, 나의 손은 예전의 그 손보다 약간 더 커졌을 뿐이다. 막노동한번 해보지 않은 것같이 뽀얀 색깔이다. 보기만 해도 힘이 느껴지는 힘줄은 보이지 않는다. 마디마디 강인함이 배여있던 아버지의 손과는 너무도 다르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가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시간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졸업장과 학위기, 컴퓨터와 자격증, 번듯한 직장과 승용차.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무척이나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죽는 그 날까지 가질 수 없을 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당신께서 살아왔던 세월, 당신께서 겪여야했던 수많은 일들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지친 어깨에 힘을 주셔야했던 그 긴 시간들이 아버지의 손속에 녹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가녀린 손을 보며 아버지의 손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