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은 여자라면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시기일것이다.
지금의 아이들 보다는 그리 자연스러운 느낌은 좀 떨어지긴해도
깔끔한 세라복에 양갈래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와 동그란 빵모자
그옷에 잘 어울리는 사각 가방까지.. 지금은 그런 교복을 입는 학교를 보진 못했다.
월요일이면 교복깃은 더욱 하얗게 보이고 아이들의 걸음은 활기찼었다.
쉬는시간 재잘거림이야 지금도 마찬가지 풍경일테지만, 매점을 들락거리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다니던 아이들..
앨범속에 기억되어 있는 어느 고등학교 3학년때의 모습들은
화사하게 뽀오얀 벗꽃밑에서의 한컷의 사진과 청소하다 말고 에이프런을 입은채로 찍은사진
선생님과 찍은 사진들..모두가 추억의 시간들..그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많다.
총각선생님과의 첫사랑얘기도 그렇고 즐겨듣던 그시절의 음악까지도 생생하며
미술실에서 어느 따스하고 포근하던 토요일 하루를 꼼짝 않고 이젤앞에 앉아
있던 기억들..
이학년의 미술부 할때의 기억이 나에겐 가장 크게 남아있다.
그림이라곤 제대로 배워본적도 없었고 미술관을 가본적도 한번 없었던 때였다.
그냥 그림이 좋아서 스케치북에 HB연필로 외국 영화배우의 작은 사진을 보고
조그만 밥상에 앉아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일이 나의 취미였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선생님이 되셨고 어느날 궁금증이 생겼다.
내그림은 어느정도일까하고 말수가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아주 용기있었던 일이었다.
더 이상 늘지않는 그림도 그랬고 어느정도까지 해야 잘하는것인지 조차도 몰랐으니까.
그 스케치들을 보시곤 누구누구네?하시며 알아보시는거다..난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았었다.
누군지만 알아봐 주는것만도.
어느 청소가 끝날 무렵에 선생님이 앉아봐 하시더니 내 얼굴을 스케치 해주셨다.
그리곤 너 미술부해라 하신다.
그날로 어쩌다 미술부원이 되었고 학교의 맨위 8층에 삼면이 유리로 된 여러가지
석고상이 가득한 그곳에서의 추억은 참으로 많다.
처음 미술실 올라갔을때 몇명 안되는 아이들 만이 앉아 있었다.
이젤과 내눈엔 커다랗게 보이던 캠버스, 4B연필 한자루, 그앞에 앉은 나..
\" 지금 부터 무엇이든 그려봐라~\"하시곤 내려가신다.
'어머나 이를 어째..이렇게 커다란 곳에 무슨 스케치를 하라는 거지?'
다른 아이들은 끄적거리며 잘도 진도가 나가는데 난 손가락하나 까딱도 못하고
그자리에 석고상과 같은 신세로 앉아 있을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 뎃상하는것만 구경하면서..
한참후 올라오신 선생님..
\" 아니~왜 아무것도 없어? 뭐야~\" 하시곤 다른 아이들 그림을 하나 하나 봐주셨다.
선생님도 황당하셨겠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나
생각하니 창피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들 가버린 미술실..
소음하나 없는 그곳에 다시 올라와 보니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아까 그 아이들 보다는 잘할 자신 있는데 혼자 이렇게
중얼 거리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젤을 펴고 온통 하얀 캠버스를 올려놓고는
석고상 앞에 가서 휘 둘러 보았다.
\"어떤 놈으로 할까~~그래! 너다! \"
긴목을 약간 비틀고 굵은 곱슬머리에 오똑한 코, 쥴리앙
그리곤 토요일 오후 시간 가는줄 모르고 그리기 시작했다.
서너시간을 그렇게 그자리에 꼼짝않고 앉아서..
\"휴~~이제 좀 속이 풀리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그 그림을 둘둘말아 미술실 탁자 서랍에 처박아 넣었다..
그일을 잊어버리고 며칠후 미술실 대청소가 있다고 올라오라 했는데
조금 늦었다. 올라가보니 모두들 와 있었고 시끌벅적 난리다.
\"누구야! 누구!\" 내눈엔 무척 화가 나신것 같은 선생님의 모습..
왜저러시나? 하고 보니 선생님 손에 내그림이 들려 있었다.
\"이거 누가 그린거냐니까? 안나와!!\" 하신다..
잔뜩 겁이나고 너가 무얼 할줄안다고 끄적꺼려 놨냐며 혼날까봐
한참을 주저하다가
\"제가 한건데요~\" 하며 주늑이 있는데로 들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정말? 누군데? 누구야? 뭐? 너가 그린거야?\" 하신다.
\"네~~저...\"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래! 이렇게 그려야지..모두들 이거 보고 배워\" 하시며
미술실의 게시판 한가운데 있던것을 이것저것 띠어 내시곤 압정으로
꾹 눌러 꼽으셨다.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고..
그뒤 선생님은 화방에 가셔서 정밀묘사에 쓰는 연필의 종류는 다 사주셨고
학교 미화일엔 불러내곤 하셨다.
수없이 드나들던 미술실..
어느날은 그림에 정신없이 있다가 자꾸 안보이는 캠버스에 눈을 비비며
노을이 지는줄도 모르고 혼자앉아서 뎃상을 하던 기억들..
미술 전공을 했었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 본다.
상업학교였던 그곳에서 일년뒤 대학을 갔다하니 모두들 그랬다.
미술대학 갔지?라고..
지금도 많은 아쉬움은 있다..하지만 미술전공을 하고 지금 전문인이 되었다면
아마도 그 여고시절의 추억들은 이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지 못했을꺼라고..
지금도 주변에 집안에 작업실 하나가 있는 그런 주부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만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갖는다는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인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힘이 되고 보람이 되어줄 일이 있다는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