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 날, 문득 출입문 밖에 놓여진 쓰레기통 안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들을 본다.
이윽고, 타르와 니코틴과 일산화탄소와 온갖 해악들로 무장한 담배연기들이 내 목에 창을 겨누고 달려오는 적군같이 머리를 봉두난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순식간에 이것들은 가슴속을 채운다. 아니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앗기 위해 심장을 옥죈다.
\"턱!\"
목심줄이 끊어져라 불거지도록 버텨보지만 하늘하늘 힘 없는 연기들이 마치 철퇴인 양 목숨 한 가닥을 부숴놓는다. 저마다 이유 있는 사연들이 가슴속을 저미고 도려내는 것 같다.
결국 현기증과 구토와 목울대를 타넘고 입안에 고이는 시고도 쓰디 쓴 진액들, 올 한 해 내게 주어졌던 아픔들이 한꺼번에 다가서고 엄습하여 몸과 마음을 허물어트린다.
그러나 나는 주머니를 헤적거려 또 한 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인다.
*
지난 봄, 어머니는 아버지를 여읜 슬픈 가슴을 움켜쥐시고 막내아들 집으로 들어오셨다.
얼굴 가득 온몸 가득 갈가리 갈라진 주름 마다에 비통함을 채운 채 내 집 출입문을 붙잡는다.
그때 어머니 등뒤에 놓여진 쓰레기통 안에는 몇몇 되지 않는 담배꽁초가 놓여 있었고, 그것들은 어머니가 안고 오신 슬픔에 견주면 단 한 치도 안되는 아픔일 뿐이었다. 다만 내 감정이 사그라진 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떡시루에 켜켜이 얹히는 떡살들처럼 꽁초들은 그 두께를 더해간다.
\"인생은 마른 장작과 같단다. 그렇단다.\"
어머니, 당신의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옮아가는 불씨를 보고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이제 그만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놓여나시길 염원하였을 때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스스로든 다른 이로부터든 제 몸을 다 태우기 전까지 가벼울 수 없는 것이 인생이란다. 그렇단다.\"
어머니 말씀을 마저 듣기도 전에 출입문 밖으로 뛰쳐나와 피워 문 담배, 가슴 끝자락을 태우는 불씨가 목을 메이게 한다.
긴긴 여름 더디 가던 해걸음이 선선한 갈바람에 밀려 서산으로 비껴넘던 날, 어머니가 홀연 자리에서 일어서신다.
\"아무래도 내가 니 큰형 집으로 가야겠구나.\"
느닷없이 그 노구에 힘을 실어 일어서는 어머니를 만류하지 못하고 내 집에서 떠나보낸 뒤, 그동안 보살펴 받들었던 사랑과 어머니에게로 향해 있던 시선들이 어찌 그리 볼품 없어 지는 지. 마음조차 어머니가 머물고 계셨던 빈방처럼 어둡고 허허로워서 며칠 동안 출입문 밖을 서성거린다.
출입문과 빈방 그 언저리를 서성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입안을 채우는 담배연기는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어느 날, 아마도 다 태우지 않은 담배를 꺽어 쓰레기통에 내던지던 그날이었을 것이다.
\"큰형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럼 거기가?\"
\"병원인데... 형의 의식이...!\"
큰형수로부터 걸려운 전화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와 온몸에 틀어박히는 못들로 가득했다. 돌이켜 볼 것도 없이 어머니가 가고싶어 했던 큰형님 댁이었다.
또다시 아들의 죽음, 그 무거운 짐을 지시기 위해서 그렇게 서둘러 가시고자 했는가!
큰형님이 쓰러져 누워 있는 병원으로, 서울로 가는 길, 내리뻗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차는 왜 이리 더딘가! 헤아릴 수 없는 짐짝들이 도로 위로 덜컥덜컥 내려앉는 것이 촌각을 서두르는 내 마음을 기구하고 애꿎게 만든다.
내게 주어지고 스스로 구하는 행복이 클지언정 어찌 한꺼번에 닥치는 저 고통의 급물살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불과 몇몇 행복이란 바윗덩이로 소양강댐 또 평화의 댐 보다도 더 튼튼한 마음을 댐을 어떻게 세우고 건설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그래서 인생은 다만 마른장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던가 보다.
의식을 놓고 넋마저 잃은 큰형님을 뒤에 두고 떨구는 고개가 더없이 무겁기만 하다.
\"언제 아시게 되겠지만 당신 아들이 저 지경이 됐다는 걸 알리지 않는 게 좋겠죠?\"
어쩔 수없이 고통의 계단을 내려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전, 큰형수 하시는 말씀이 마음의 과녁에 겨누는 불화살 같아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
봄날 이후 이때까지 내내 의식하지 못했던 출입문 밖 쓰레기통. 그리고 그 안에 오롯이 담겨 있는 담배꽁초들.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때를 기다려 말끔히 비워버려야 할 것들. 이제는 마음으로 두드리는 컴퓨터 자판마다 저 고통이 담긴 담배꽁초들을 비우고 날려버리기 위해 힘을 실어야만 한다. 마른장작에 새움이 돋을 수야 있을까 마는 불태워져 검은, 그 보기 흉한 자리라도 북북 긁어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올 봄날을 맞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