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생활에 있어 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품위를 따져야 합니다.
그는 세련된 사람입니다. 옷을 입어도 아무거나 함부로 입지 않습니다. 추운 날이면 무슨 동물의 털을 목에 두르고는 멋진 코트를 턱밑까지 올려 받쳐입고, 무더운 여름에도 턱시도나 넥타이를 맨 차림입니다. 하긴 그가 가는 곳은 항상 철저하게 냉방이 잘 돼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그는 커다란 백화점을 여유 있게 쇼핑하며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옷만을 걸칩니다. 아니 걸친다는 것은 그를 욕되게 하는 표현입니다. 잘 차려입는다고 해야겠네요. 그는 동대문시장 같은 곳은 구경도 못해봤습니다. 남대문시장에는 가판대에서 '골라, 골라...'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합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멋진 옷차림으로 상들리에가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에 들어갑니다. 밥을 먹을 때도, 아니 이것도 잘못된 표현입니다. 오찬이나 만찬을 할 때도 항상 곁에는 눈이 부실 정도의 미녀가 대동합니다. 그리고 가끔씩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몇 마디만 합니다. 식사 중에 말이 많은 것은 교양이 모자란 사람이지요. 목에는 손수건 하나를 매달아 놓고 혹시 밥풀 하나라도 떨어질까 염려합니다. 식사 메뉴는 이름도 처음 듣는 것이라서 여기서 쓰지 못합니다. 일러주어도 프랑스 말인지 이태리 말인지 꼬부라지는 어려운 발음을 따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식사 중에 날씬하게 생긴 잔에다 초록색인지 청록색인지 개미 눈물만큼 담긴 술을 조금씩 음미하듯 마십니다. 거듭 실수하는군요. 그냥 술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칵테일인지 꼬냑인지 모르니까 그냥 술이라고 한 거예요.
그는 식사 후 녹차나 둥글레차처럼 촌스런 차의 향을 싫어합니다. 오리지널 커피 향이 나는 그것도 이름이 긴 무슨 차를 한 잔 마십니다. 차를 마실 때도 심심하지 말라고 바이올린이 스피커에서 혼자 울어줍니다. 가끔은 누군가 옆에 와서 직접 연주해주기도 합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오면 캐딜락인지 롤스로이슨지 차 모양만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굉장히 기다랗고 멋들어지게 빠진 지붕이 없는 하얀 색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차에 멋지게 오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 오르는 게 아니라 누가 보아도 품위 있어 보이도록 세심한 주의를 합니다.
그가 가는 곳은 세계적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인 '런던'이 연주하는 대공연장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몰려와도 S석 그의 자리는 항상 그를 기다리며 남아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의 한 달 월급만큼 비싼 그 자리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만이 앉을 권한이 있습니다. 모두들 더운 여름인데도 넥타이로 목을 잔뜩 잡아매고 있습니다. 표정들도 한결같이 여유 있고 가진 자의 품위가 겉으로도 드러납니다. 그는 런던 필이 연주하는 음악에 심취해 가끔씩 눈을 감고 깊은 여운을 즐깁니다. 누가 보면 졸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그는 일반석의 다른 사람들처럼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품위를 생각해야지요. 그는 가볍게 몇 번만 손바닥을 마주칩니다. 그는 공연 내내 아주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합니다. 그는 긴 공연임에도 하나도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표정 관리도 그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그는 파바로티나 도밍고가 부르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노래의 가사를 알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해야 자신의 품위와 어울리는 것이기에 잘 알지는 못해도 그런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바이올린이나 플롯이 내뿜는 선율도 그는 참 좋아합니다. 어떤 때는 그런 음악을 틀어놓고 조용히 감상하다 잠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염려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코라도 골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자는 동안의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그는 라디오는 거의 켜지 않습니다. 가끔 라디오를 켜게 되면 '사랑은 아무나 하나' 같은 수준 떨어지는 노래도 아닌 노래가 나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이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벼운 미소를 주위의 사람들한테 보냅니다. S석의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얼굴들입니다.
그는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 나옵니다. 길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의 최고급 승용차를 한 번쯤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흐뭇합니다. 그는 다음에는 버스만큼이나 긴 리무진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우리 나라의 도로 여건상 맘 편히 끌고 다니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약간 우울해합니다. 그의 멋진 차는 유유히 커다란 대로를 미끄러져 나갑니다. 그 많은 자동차들을 재빠르게 추월해 나갑니다. 낡은 트럭과 승합차들이 커다란 탱크 소리를 내며 엉금엉금 기듯이 앞서 갑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환경미화적으로나 공해해소적인 측면에서라도 저런 고물들은 길거리로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입니다.
그의 집은 아니 저택은 육중한 철대문을 세 개나 지나야 본 채가 나옵니다. 커다란 개들 몇 마리가 꼬리치며 그를 맞습니다. 이층으로 된 그의 집은 들어가 보지 않아 무어라 쓰기가 그렇군요. 하지만 그의 정원은 수천 평은 되는 듯했고, 마당엔 수영장도 있습니다.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웬만한 시골의 초등학교보다 커 보입니다. 그의 가족이 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의 수준에 맞는 품위를 지키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말도 조용하게 해야 하고 말이 많으면 자신의 품위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품위 있는 언어생활을 위해 명언집이나 고상한 책들에서 말을 고릅니다. 상류사회에서 써먹기 위한 이런 또 실수, 구사하기 위한 능숙한 화술을 위해서 그는 대단히 의미 있는 말들과 간단하지만 위트가 있는 문장을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잘 합니다. 정말 달변가입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얼마나 연습을 해댔는데...
그는 누가 보아도 걱정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집도 대궐 같은데다 웬만한 아파트보다도 더 값나가는 자동차도 있고, 하룻밤에 삼백만원짜리 양주를 들이켜도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이 줄어드는 걸 느끼지 못합니다. 그의 주머니는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돈을 생산해내는 공장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괴로워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많은 여건이 그의 행복을 뒷받침해주는데 무언들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도 가끔씩 마음 상하고 염려하고 화나는 일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그는 도대체 얼마짜리인지 짐작도 안 되는 그의 번쩍이는 구두에 물방울이 튈까 조심합니다. 그 동안 식후에 '역시 이 맛이야.' 속으로 그윽이 맛을 음미해오던 수입 음료가 가짜였다는 보도가 나오면 그는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납니다. 시내를 다니다보면 자신의 품위와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장마차나 노점상이 보입니다. 그는 그것들도 싫고 그 사람들도 싫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웃음을 짓는 것도 그는 싫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밖에도 그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많은 고민을 합니다. 내일 아침은 그 많은 값비싼 옷들 중에서 어떤 걸 입지? 구두는 어떤 색으로 신을까? 강남 쪽에 새로운 고급식당이 생겼다는데 어떤 게 가장 맛있을까? 어제 들른 금은방에는 별로 비싼 보석이 없었어. 내일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 중에는 수준이 한 수 아래인 중소기업 사장도 끼어 있다던데, 갈까 말까? 정말 많은 고민을 합니다. 참 힘든 고민을 많이 합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단 한 가지도 비슷하거나 가까운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우선 나는 세련되지 못했다. 아직까지 촌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턱시도 같은 건 입어본 적도 없고 또 입더라도 전혀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금궤짝에 고구마를 담아도 고구마는 여전히 고구마인 것이다. 나는 보통들 말하는 '메이커'를 거의 따지지 않는다. 가끔 아내가 이건 무슨 메이커의 옷이라고 좋은 거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얘기는 무시한다. 싼 거든 비싼 거든 입는 건 똑같다. 싸고 이름이 없는 옷도 많이 사줘야 그걸 만든 사람도 돈 많이 벌어 좋은 옷을 만들 게 아닌가.
나는 백화점의 제복 입은 사무적인 태도의 점원보다는 동네 아줌마의 농담 섞인 말투가 더 정겹다. 시골 장터에서 고사리나 나물 종류를 한 줌씩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주름 깊이 패인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김치찌개, 순두부찌개...'라고 투박스런 글씨가 써 있는 자그만 식당도 좋다. 칼질하는 자리는 뭔가 격식을 따지는 게 많을 것 같다. 또 거기서는 우걱스럽게 먹기도 뭣하다. 맘 편하게 여럿이 담소하며 정을 느끼는 게 음식의 맛보다 더 맛있다. 밥을 뜨다가 밥덩어리가 식탁에 떨어지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다시 집어먹을 수도 있다. 굳이 반주가 필요하다면 소주도 좋고 막걸리도 좋다. 엄지손가락 만한 유리잔에 담긴 갈색 빛깔의 양주도 물론 비싼 거니까 좋겠지만 뿌연 막걸리를 손가락으로 휘저어 걸쭉하게 마시는 맛도 정말 달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열창하는 노래는 알아듣지 못해 어렵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나의 이해가 따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열창하는 모습이나 강한 테너의 목청이 나의 귀를 두드릴 뿐이다. 고교시절 유난히도 또래의 아이들은 팝송을 즐겨했다. 잘도 불러대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내용을 물으면 전혀 모른다. 가사만 외워서 음정을 따라 부르지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며 부른 아이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팝송을 모르면 부끄러운 일인 듯이 너도나도 가사 외우기에 열심이었다. 하도 저절로 들려서 음정은 귀에 익은 것이 몇 개는 있지만 내가 불러본 팝송이나 가사를 외우려 노력해본 팝송은 하나도 없다.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굳이 애써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역시 나는 쿵짝 쿵짝 송대관의 '네 박자'나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같은 노래가 일단 귀에 먼저 들린다. 가사가 들리기 때문이다.
나에게 공연 관람의 공짜 티켓이 주어진다면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십몇만원짜리 공연보다는 오천원짜리 무명 놀이패의 마당놀이 공연장을 찾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자리에 앉아 지루해하기보다는 이해가 되고 함께 웃고 이따금씩 '얼∼쑤!'를 외치며 신명나는 우리의 소리를 찾을 것이다.
영화 중에서 특별히 감동을 받은 외국영화는 별로 기억에 없다. '서편제'에서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시골길을 가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일행의 장면이 기억난다. 진도아리랑의 신명나는 가락에 어깨춤이 절로 들썩인다. 역시 나는 우리의 가락, 우리의 소리가 너무도 흥겹고 즐겁다.
내가 아는 그 남자가 타고 다니는 그 멋들어진 차를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초보인 아내한테는 좀 중형이라는 차를 하나 사줬다. 초보인지라 어디다 들이받아도 소형보다는 좀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내 차는 94년식 승합차다. 벌써 8년째 나의 발이 돼주고 있는 고마운 차다. 이 놈이 가끔씩 속을 썩여 내 재산을 축내기도 하지만 정이 들만큼 들었다. 워낙 속을 자주 썩일 때면 아예 차를 바꾸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아주 폐차시키게 될 때까지 탈까 하는 생각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늙어 죽게 될 때 그간의 정 때문에 무덤 하나 마련해준다는 심정으로...
어린 시절 시골집은 화장실이 꽤나 멀었다. 비가 흩뿌리는 밤이라도 될라치면 혼자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 고모나 삼촌이 같이 가줘야만 했다. 요즘 아파트 문화는 사람들에게 많은 편리성을 준다. 기껏 몇 발짝 걸으면 안방, 건넌방, 주방, 화장실 등 쉽게 갈 수 있다. 나는 지금 큰 평수는 아니지만 방 세 개 있는 집에서 산다.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매미처럼 몸을 붙여 자야만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들에게 방 하나씩을 주고 아내와 단둘이 쓸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가끔 아내가 '여보, 친구네 집에 갔더니 몇 평짜리인데 우리 집보다 훨씬 커 보이던데, 다음에 우리도 그리 이사가요.' 한다. 이 사람이... 큰 평수면 청소하기만 힘들지. 이 정도면 우리 네 식구한테는 딱 알맞지, 뭘 더 넓은 집이 필요해?
나는 내가 아는 그처럼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조리 있게, 논리 정연하게, 침착하게 말을 이끌지 못한다. 어떤 때는 말이 빨라지고 무슨 말인가 하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도 횡설수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 말싸움을 하면 누구한테도 당해내지 못할 거다. 상류사회의 언어는 어떠한 것일까 궁금하지도 않고, 배워보고자 하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냥 나는 평범한 범부(凡夫)로서 나에게 어울리는 말들을 한다. 좋은 말만 골라하는 피곤한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물방울을 튀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한 번 눈을 부라리고는 속으로 작은 욕설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금새 잊는다.
나는 내가 아는 그 남자보다 염려하고, 마음 상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별로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내일 입을 옷도 고르고자시고할 것도 없이 손에 닿는 걸 주워 입으면 된다. 구두? 그것도 마찬가지다. 최고급식당? 그런데는 가본 적이 없다. 몇 년 전 결혼 십 년만에 아내한테 큰맘 먹고 십몇만원짜리 진주반지 하나 사준 것이 금은방 출입의 전부다. 골프장은 멀리서 구경만 했지 그 잔디의 부드러움이 어떤지 감도 못 잡는다. 또 내 주위에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조그만 구멍가게, 포장마차, 구두 닦는 사람도 많고, 순대나 번데기 장수도 많고, 실업자도 많고, 하루를 한 끼로 간신히 때워야 하는 더 가난한 이들도 많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는 그 남자는 나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하며 사는 불쌍한 사람 같다.
나는 기껏해야 내일은 어떤 즐거움으로 하루를 보낼까... 단 하나만 고민하며 사는데...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나는 그를 많이 봤지만 그는 나를 한 번도 가까이 한 적이 없다. 물론 그가 나 같은 사람을 가까이 할 리도 없지만 나도 결코 그에게 정이 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동경한다. 환상으로 그와 같은 위치에 서길 꿈꾼다. 그 불쌍한 사람을 줄기차게 동경한다.
그는 단지 영화의 주인공인 것을...
진안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