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도 꿈을 꾼다.
가난도 꿈을 꾼다. 가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바로 꿈이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두 개의 철길 사이에 끼여 있는 초라한 집에서 두 해를 보냈다.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굉장히 시끄러웠으며 따라서 집세도 쌌다. 조잡하게 대충 지은 집이었기 때문에 틈새로 바람이 도처에서 들어왔다.
덕분에 여름은 쾌적했지만 그 대신에 겨울은 지옥이었다.
석유난로를 살 돈도 없었기에 해가 저물면 나와 그녀와 고양이는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서 글자 그대로 서로 끌어안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의 설거지통이 얼어붙는 일 같은 것도 늘상 있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왔다. 봄은 멋진 계절이었다.
봄이 오면 나도 그녀도 고양이도 한숨을 돌렸다.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적어도 추위에 떠는 일 만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4월에는 철도청에서 며칠 동안 파업을 했다. 파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열차는 하루종일 단 한 번도 철길 위를 달리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철길로 내려가 뒹굴면서 한가롭게 햇살을 쬐었다.
마치 호수 바닥에 앉아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철길 가에는 들풀이 자라고 있었고 색깔이 알록달록한 꽃들도 피어 있었다.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재잘거리고 사방은 노아의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적막했다.
이대로 그냥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겠는데 하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우리는 젊었고 막 결혼했고 햇살은 공짜였다.
----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中 ----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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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좋아하는 사람이 요즘같은 시대에 있을까...
난 가난하게 자라긴 했지만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보지는 못했다.
가난의 짐은 부모님의 몫이었다고 생각했을 뿐.
나의 짐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스스로 돈을 벌면서 이젠 그 가난이라는게 나의 언저리를 맴도는듯 하다.
반 어른이 되면서, 취직을 하면서, 봉급장이가 되면서 놀라우리만치 현실에 익숙해져간다. 또한 해가 거듭될수록 나의 미래가 두렵다.
지금이 어떠냐고 번듯한 직장있고 부족함 없는 네가 실없이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핀잔을 주는 친구에게 덤덤히 말했다.
"부모님 만큼이나 살아갈 수 있을까?... 새삼 존경스러워져 이 험한 세상에서 누나와 날 길러내신게..."
난 솔직히 가난이 달갑지 않다.
그 기억들이... 가난으로인해 벌어졌던 많은 갈등들과 눈물들을 체험으로 얻었기 때문에..
하지만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돈으로도 살수 없는 귀중한 선물임을 잊지않는다.
풍족하게 자란 또래 보다 먼저 성숙할 수 있었고
잡초처럼 굳세게 일어서는 부모님을 보며 존경할 수 있었고
어릴적 아버지가 사다주신 1000원짜리 전자시계에도 눈물을 흘릴만큼 가슴깊이 감사하는 가치관을 얻게되었으며
여섯번의 전학을 다니면서 뛰어난 적응력과 친화력을 갖게 되었고
함께 가난했고 그 정서를 공유하는 소중한 죽마고우들을 얻었다.
그래 가난도 꿈을 꾼다.
하지만 행복의 궁핍속에, 생각의 가벼움속에 가난은 꿈조차 꿀 수 없다.
그걸 잊지 않는한 난 가난해도 꿈다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삶으로서 부모님께 보답하며...
가난을 훈장처럼 생각하진 말라는 친구의 충고가 뇌리속에 남는다...
-청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