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 한 방울쯤 떨구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런 아픔도 슬픔도 없는 이파리 하나에 어디선가 주워온 감정찌끄러기를 씌워 괜스레 아픔과 슬픔에 겨워하던 시절이었다.
한 때는 그러했었다.
나도 한 때는
문학 한답시고 소월의 애꿎은 시를 덧없이 읊조리며 시름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용은 같아도 제목이 다른 시집을 무수히도 사서 무슨 철학가인 양 소월의 애수에 푹 빠졌었다. 문학소년, 소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있을까마는
한 때는 그러했었다.
나도 한 때는
그림깨나 해보겠다고 종이 한 장과 연필 하나면 지나는 사람의 뒷통수도 똑같이 그려냈었다. 어느 공원 벤취에서 옆 벤취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너무도 고운 여학생을 보았다. 내 조그만 스케치북에 여학생의 이쁜 뒷모습을 그대로 찍어냈다. 스스로도 자랑스레 감상하다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뒷모습이 너무 고와 그렸는데, 맘에 드시면...\"
여학생은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기뻐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렇게 곱던 뒷모습이 앞은 왜 그런지, 그냥 뒤만 보고 행복해 할 걸...
나도 한 때는 그러했었다.
빈센트 반 고호의 강렬한 그림을 보았는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미쳐버린 그가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귀가 잘린 자화상'. 슬픔과 애수와 고뇌와 번민이 잔뜩 깃들어 있는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 한 때는, 옛날 한 때는 그 사람의 그림이 왜 그렇게 좋던지. 내 마음에 꼭 와닿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나도 한 때 미쳤던 건 아닐까. 어쩌면 차라리 그 시절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감정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고호의 자화상을 보면서 인상파 화가는 자화상의 고호처럼 인상을 쓰는 것인가 하는 메마른 감정을 가진 지금의 나는 무언가. 살이에 지친 때문인가. 바삐바삐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오늘 하루를 그나마 간신히라도 보내기 위해서는 연구하고 노력하고 싸워야 할진데 무슨 염세주의적, 감상주의적 사고인가. 어쩌면 차라리 메말라버린 감정이 맘 편할 듯도 싶다. 그저 각박한 현실이라면.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사는 게 어렵다고들 한다. 물질적, 마음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바둥거리며 어렵게 사는가. 누군가가 그랬다. 명답이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 거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만 결국은 밥 세 끼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적당히 살아도 웬만큼 밥 세 끼는 먹고 살잖아?\"
\"좀더 열심히 힘들게 살아야 밥 세 끼에다 간식 한 번 더 먹지.\"
결국 나는 간식 한 번 더 먹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