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질끈 동여멘다.
어느날 우유아주머니가 건네고 간 `00우유'라는 커다란 마크가 씌어진
앞치마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거울앞에 선다.
피시식~~
윗층 꼬맹이가 \"아줌마\"라고 부른게 맞는 말인가 보다. 꿀밤하나 먹인게
괜스레 미안해짐을, 언제나 소녀인줄만 알았더니 `시나브로'란 단어가
이제서야 마음 깊숙이 각인 되어져 오는 것을 어쩔수가 없다.
손을 뿌득뿌득 문질러 씻으며 가족을 위해 한끼를 준비하는 정갈한
어머니의 마음이 되본다.
쌀한바가지를 시원한 물로 빡빡 문지르니 희멀건 쌀때들이 뿌옇게
흐려나온다. 마음의 때들도 이리 씻겨낼수 있었으면, 몸의 때야
이태리 타올로 빡빡 문지르면 된다지만, 마음의 때는 `도'라도 닦어야 되지
않으려나. 번뇌에 몸부림하는 스님의 마음도 되본다.
마지막 깨끗한 뜸물을 받아내고, 조리를 손에 쥐고 걸러본다.
폼이 제법 그럴듯하다. 사실 이렇게 아줌마 티가 날 정도의 세월속에
난 밥은 커녕 설겆이 통에 손을 담가본것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다.
그런내가 모래알같이 들어찬 쌀알갱이 속에서 돌바늘을 어찌 찾아
낼수 있으리요. 이렇게 됀건 게으른 나의 탓도 있지만, 어린시절을
고생하며 큰딸로 자란 어머니의 사고가 크다.
엄마는 `삼베'로 유명한 고장에서 자랐다. 종일을 베를 다듬고 짜는
할머니를 대신해 엄마는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일곱살때부터
커다란 검은솥단지에 밥을 해가며 동생을 업어 키웠다니, 그 고생이야
안봐도 어림짐작할 수 있슴을.
난 외할머니를 기억한다. 베한올한올을 다듬느라 앞이는 다리를 받치는
버팀목처럼 두갈래로 갈라지고, 손과 허벅지는 뻣뻣한 고무가죽을 연상케
한다. 그게 바로 엄마가 보고 겪고 자란 여성의 삶이다.
\"여자가 시집오기전에 고생하면 시집가서도 평생 고생하며 산단다\"
엄마가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안은 이유이다.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딸에게만은 그런 삶을 짐지우지 안으려는 자식에 대한 가련한 애정임을
난 알고 있다. 그런 엄마의 사고와 나의 게으름이 딱 들어맞아 지금까지
집안일엔 거의 무지에 쌓여왔다. 철이 덜 들었을 무렵 우리집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장난스레 물어왔다.
\"어머 벌써 처녀티가 나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가서 어떻게 살래?\"
\"전요 부잣집에 시집가서 가정부 두고 살 꺼에요\"
뚝배기에 된장 한 웅큼을 담고 받아둔 쌀뜸물을 붓는다. 음식맛은 손맛
이라는 말이 생각나 손을 푹 집어 넣고 된장을 으깨 본다. 그동안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곁에서 수다를 떨며 보아온 것이 있어서이다.
손가락 사이로 된장알갱이들이 흐느적 거리며 빠져나가는게 기분이 썩
괜찮다. 불을 올리고 야채를 다듬기 시작하는데, 양파를 앞에 두고
고민에 쌓였다. 고추와 파는 어슷썰기하고 두부는 네모썰기하면 된다지만
동그란 양파는 어찌해야 돼는지. 가사시간때 배운것과 그동안 줏어들은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 보지만, 동그란 양파하나로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에라 모르겠다.
반으로 툭 자르고 쓱싹쓱싹.. 양파 한잎한잎들이 제각기 흩어져 버린다. 이건
그동안 내가 보아온 된장국속의 양파들이 아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양파가 매워서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아서도 아니다.
잘못된 칼질한번으로 알알이 흩어져버리는 그 모양새가 다른이의
매운 칼질에 부셔져버린 나일수도 또는 나의 서툰 칼질에 상처입은 다른이의
마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이다.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뚝배기안에서 끓어넘치는 된장국의 구수한 향내가
군침이 돈다. 맛을 본다. 제법 된장국의 맛과 모양새가 그럴듯하다.
손맛좋은 엄마의 피가 어딜가려나.
커다란 국그릇에 보기좋게 된장국을 담고, 조금은 됨직하게 된 밥 한그릇을
퍼 김치와 함께 상을 차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오라버니에게 건넨다.
부실한 상차림이지만, 된장국에 고봉밥을 말아 깨끗이 비워내는 오라버니의
모습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어렸을때 그리도 싸우고 자랐건만 말하진 않아도
형제라는 가족의 울타리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끈다는걸 알 수 있다.
오라버니는 알려나. 나의 첫 작품이 바로 그 누구도 아닌 오라버니의
몫이었다는 것을...
불구덩이. 이마엔 땀이 삐질삐질하다. 미지근한 물속의 난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벼워진다. 어려운 속제를 끝내고 난 어린아이의 후련함과 대견함이다
앞으로 더크고 어려운 숙제들이 남아 있다는 걸 모르는...
아직까지 철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