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탐방기
- 여강 최재효
“사장님,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아, 예, 예. 좋습니다.” 입술이 유난히 빨간 긴 머리 아가씨는 미
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이용한 자신의 작품이 어떠냐고 나에게 점
수를 매겨달라고 한다. 졸지에 사장이 된 나는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고개를 45도 쯤 숙이고 앉아 있다가 미용사 아가씨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병원에 들락거리기 전인 지난 해 봄만 해도
준수한 용모의 남정네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거울 속 모습을 들
여다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었다.
언제부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즘 젊은 남자들은 여우가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남성 전용 이발소를 잘 찾지 않는다. 물론 젊고 예쁜 여자 면도사가 있는 이발소를 즐겨 찾는 사내들도 있기는 하다. 예전에 나는 이발을 할 때가 되면 '으레 십여 마리의 새끼 돼지들이 어미 돼지의 젖을 빠는 장면이나 갑순이와 갑돌이가 남몰래 밀어를 주곤 받았을 것 같은 물레방앗간 그림'이 걸려있는 동네 이발소를 찾았다.
밖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물결무늬 사인볼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창문에 큼직한 글씨가 박힌 신성한 금녀(禁女) 구역이었다. 동네 이발소는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잘 해냈다. 복덕방 김씨, 정육점 박씨, 목욕탕 정씨, 신발가게 최씨 등 동네 터줏대감들이 가게 문을 열고 아침 10시 쯤 꾸역꾸역 모여드는 곳이 동네이발소였다.
포마드로 한껏 멋을 낸, 물찬 제비같은 이발소 주인은 커피 한잔 씩 돌리고 손님들에게 주워들은 동네의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소식을 터줏대감들에게 고한다. 터줏대감들은 문제가 있는 사안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토론 결과를 통장이나 반장을 통해 행정관서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인터넷이 각 가정마다 진을 치고 모바일 서비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에 젊은 세대에게 동네 이발소는 생소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간판과 실내 인테리어도 여성 전용 미용실 수준을 넘어 예쁘게 치장한 남성 전용 미용실 또는 남녀 구분 없이 손님을 받는 미용실이 생기면서부터 돼지 그림과 물레방아 그림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남자들에게는 가슴 뛰는 일이 많아졌다.
가격도 물론 저렴할 뿐만 아니라 예쁜 아가씨나 미시(Missy)가 머리를 다듬어 주는 날에는 오감(五感)이 벌떡 일어나 잔뜩 긴장한다. 내가 단골로 가는 미용실에는 두 명의 아가씨와 주인인 듯한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있다. 보통 한 달에 한번 미용실에 가는 나는 미용실에 들어가기 전 미용실 안을 염탐한다. 영화배우 장미희를 연상시키는 여주인이 안 에 있는지 또는 다른 손님의 머리를 매
만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노랑머리 20대 초반의 아가씨와 2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립스틱이 빨간 긴 머리 아가씨 역시 머리는 잘 매만지지만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일요일에 미용실을 찾는데 오후 보다 한가한 오전에 미용실에 들른다. 지난 주 일요일 오전, 길 건너편에서 미리 미용실 안을 염탐을 한 나는 부시시한 얼굴로 미용실에 들어갔다. 두 명의 아가씨들이 동시에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를 건넨
다.
간발의 차를 두고 중년 여인은 나에게 시선을 맞춰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나는 지은 죄도 없는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소파에 앉아 여인의 처분을 기다렸다. 노랑머리 아가씨는 다른 남자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입술이 빨간 긴 머리 다른 아가씨는 중년 여인 파머 머리를 매만지느라 바뻤다.
여인은 나에게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고 할 때 나는 나의 절묘한 타이밍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아가씨들이 머리를 만질 때와 여인이 머리를 다듬을 때 전해지는 감이 다르다. 두 아가씨들은 입을 꼭 다물고 열심히 깎고 다듬고 자르면서 자신의 본업에 충실한 반면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나 혹은 연인을 생각하는지 중간 점검을 자주 하면서 내 얼굴 모양과 나에게서 풍겨지는 느낌 등을 다양하게 비교 분석하며 정성을 다하는 눈치다.
행여 여인의 옥수(玉手)나 풍만한 젖가슴이 내 어깨나 팔에 스치기라도 하면 나는 번개에 맞은 사람처럼 몽롱해 지면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남자 손님들에게 입으로 의사를 전하는 사무적 태도의 아가씨들과 눈으로 말하는 오묘한 감성(感性)의 마담 중에 자신의 두상(頭狀)을 누가 더 잘 가꿔줄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당연 눈이 깊은 마담을 지목할 것 같다.
사람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술에서 연륜(年輪)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장점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교양이 있고 상당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같은 연령대의 남녀를 놓고 보면 여성이 더 원숙미가 돋보인다. 나의 두 눈이 잘못 되었는지 아니면 사시(斜視)인지 모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남성이 한 단계 낮아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단연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도 크게 외모에서도 뛰어나 보인다. 공작새나 꿩의 경우를 보면 확연하다. 완력(腕力)을 요하는 전장(戰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는 옷을 짓는 일이나 자수(刺繡) 또는 음식을 조리하는 분야에서 만큼은 보통 여성이 남성들 위에 있다.
아가씨보다 원숙한 여인이 내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일은 상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맛사지를 자주 받다보면 중독이 된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만큼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은 효지시야(孝之始也)’를 잠시 잊는다.
남성만을 손님으로 받는 이발소의 경우 바로크식 스타일이라고 하면 요즘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미용실은 초현대적 유니섹스(Unisex) 스타일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듯 싶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백색 등으로 채색된 실내장식 소품들, 환한 조명, 오밀조밀하고 예쁜 장식장, 울긋불긋한 미용도구, 세련된 손짓의 미용사 아가씨, 거기에 활짝 핀 한여름 장미 처럼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여왕벌 같은 마담이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이 은밀하며, 어둠침침한 이발소를 오랜 세월 드나들던 남정네들에게는 좀 생소할 듯 하다. 미용실에서도 남자들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할 무렵 나는 여인들과 나란히 앉아 이발을 할 때는 마치 ‘여인제국’에 침입한 무뢰한 같아 괜히 무안(無顔)하거나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당황하였다.
미용실에 차차 적응이 되면서 커다란 파마 기계를 뒤집어 쓴 채 잡지를 보는 옆 여인을 곁눈질 하거나 지그시 눈을 감고 신비에 쌓여 있던 미용실이 남자들에게도 개방한 세태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옛날에는 규방(閨房)이라 하여 한 집안 내에서도 남자들과 철저히 분리된 곳이 있었다.
규방 근처에는 집안 남정네들 누구도 얼씬대거나 눈길을 주어서도 안 되는 여인들의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구역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늘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규방을 응시하기도 하였다. 나는 양파를 좋아한다. 물론 건강식품으로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껍질로 쌓여있는 양파를 깔수록 더욱 신비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인당수에 뛰어 들었다가 왕비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심청이가 양파 속에 수줍게 앉아 있을 것만 같다. 신비감이 풍기는 사람에게는 이성을 꼼짝 못하게 잡아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신비감이 여성들의 최대 무기가 되야 남,녀간에 갈등의 씨앗이 없다. 초반에 속내까지 모두 까보인 여성에게는 남자들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못한다.
영업 이익 때문인지 모르지만 금남(禁男)의 장소였던 여인들만의 공간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요즘 미용실을 보면서 적지 않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유니섹스 스타일도 좋고 글로벌화도 좋지만 여인들은 여인들만의 전용공간에서 활동하고 나름 끼를 다듬어야 남정네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메트로섹슈얼리즘(Metrosexualism)과 마초(Macho) 문화가 뒤범벅이 된 요즘 몹시 혼란스럽다. 남성화된 여성, 여성화 된 남성, 지나친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마키스모(Machismo), 혼돈의 시대에 미용실만이라도 금남(禁男)의 장소로 고집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아파트 주거형태와 핵가족(核家族)으로 인하여 남녀의 고유 공간문화 공간의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남,녀의 가사에 대한 경계도 애매하게 변질되었다. 예전처럼 여인들만의 유리성(琉璃城) 안에서 벌어지는 신비하고 은밀한 행동을 훔쳐 볼 수 있는 시절이 다시 올 지 궁금하다.
“거울 좀 보세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 예, 예. 아주 마음에 듭니다.” 따뜻한 색감의 핑크 립스틱이 촉촉하면서도 반짝거리는 마담의 입술과 은은한 미소가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15도 쯤 숙이고 묵상(黙想)에 잠겨 있던 나는 얼른 고개를 들다말고 다시 천천히 숙였다.
- 창작일 : 2010.12.23. 20:00
<script type=text/javascript>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