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을 샀다. 삼중면도날로 샀다. 필립스 전기면도기는 그런 대로 무난했고 깔끔했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날은 피하고 싶었다. 면도크림을 충분히 바른 후 푸른 독기를 내뿜는 면도날로 구석구석 피부를 한꺼풀 벗겨내고 싶을 때가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그로 인한 하찮은 -혹은 하찮다고 치부하고 싶은- 기억 따위는 깎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나지 않으리라던 질레트면도기 광고를 너무 믿은 것은 실수였다.
턱을 베이고 말았다. 인체공학을 들먹이던 과학적인 설계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힘은 내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스스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처를 볼 때마다 나는 망할 놈의 질레트면도기를 생각할 테지만 더불어 아직 온전히 건너지 못한 지난날의 통증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미혹 또는 미망? 불어터진 라면을 먹을 때와 같은 이 기분은 언제까지일까. 그 어떤 것도 나를 대신해 앓아주지 않는다는 것만이 분명할 뿐이다.
면도할 때 잡생각은 금물이다. 특히 옛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그렇다. 아프지 않은 옛사랑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쓰라린 조국과도 같다. 거부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고 도피나 완전한 결별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발을 구르며 조갈증을 냈고 가까우면 피아 간에 상처가 컸다. 쓰라리다 못해 신물이 넘어온다. 모든 여자들에게도 남자란 그것과 엇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통증같은 것으로만 남겨지고 있을까. 아무튼 내 턱에 상처가 생긴 건 순전히 여자 탓이다.
가끔은 보편적이고도 상식적인 일들이 더 기적 같을 때가 있다. 배가 고파 만두를 훔쳐먹은 사람보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더 무거운 형벌이 있어야 하며 파렴치한에게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비극적 종말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진통제와 같아서 흥분이 가라앉으면 허무해지기 쉬우니 피해야 하고, 세상의 모든 이별에 깔끔함이란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으니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부릅뜨고 각성제라도 복용해야 하지만, 이 평범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란 얼마나 희박한가.
내게 있어 상식적인 건, 시간의 사막을 건너는 동안 통증에 대한 기억도 감퇴하는 것이나 이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면도를 하지 않으면 통증은 역사적인 과거 속에 편입되어 말 그대로 퀴퀴한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될까. 문제는 역사적인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에게 있겠지만 그걸 잘 참고 침묵한다면, 네모반듯한 탁자 위의 정물처럼 심심하고도 안전한 풍경 속에 남을 수도 있으리라. 면도 따위는 상관없게 되리라. 시간은 내게도 공평하게 흘렀고, 인내심이 늘었지만 게으름도 늘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다면 담담하게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누군가 내게 다시 사랑을 해보라고 한다면 대뜸 따귀부터 한 대 올릴 것이라 공언했지만, 이 일에도 나는 담담해져야 할 것이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느니 잠을 조금 더 자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됐다. 생채기가 나으려면 그렇게 환부가 가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염이 자라나는 것을 참을 수 없던 날들이 이제 나를 지나갔다는 점이다. 오, 서프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