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 단풍(2010.11.13) 필자 직촬
선운산 秋感
- 여강 최재효
한풍(寒風)에 흔들리고 있는 아기 손은 먼 장터에 나갔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애태우는 백제(百濟) 지어미의 붉은 마음이었으며, 나라의 부름에 전쟁터
에 나가 신라(新羅)를 상대로 일진일퇴(一進一退)하거나 고구려(高句麗)와 맞붙
어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와중(渦中)에도 지아비의 지어미를 그리는 일편단
심(一片丹心)이 분명하리.
또한 저 붉고 귀여운 손들은 날마다 새벽별들이 기운을 잃을 때 까지 선운산
(禪雲山)에 올라가 집으로 돌아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
(男便)을 그리워하다 차가운 망부석(望夫石)이 된, 한 많은 백제(百濟) 여인의
피눈물이 틀림없으리. 나에게 백제(百濟)는 슬픔과 천년의 한(恨)으로 다가온
다. 추상(秋霜)에 눈이 시리도록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보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몸
서리가 쳐진다.
꽃 같은 젊은 여인들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天地)에 진동(振動)하고, 불타는
사비성(泗泌城)에는 미쳐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들의 선혈(鮮血)이 낭
자(狼藉)하다. 서기(西紀) 660년7월18일 백제(百濟)의 심장부(心臟部)인 사비성
(泗泌城)이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이 지휘(指揮)하는 나당연합군(羅
唐聯合軍)의 칼날 아래 무참히 짓밟히면서 백제(百濟)의 비극(悲劇)은 시작되
었다.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決死隊)의 항전(抗戰)도 피에 굶주린 이리떼의 발호
(跋扈) 아래 헛수고가 되었고, 결국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678년 만에 역사(歷
史)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포로(捕虜)가
되어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義慈王)을 비롯한 수많은 백제(百濟)의 누이들 가
슴에는 핏빛으로 염색(染色)된 저 가을 잎 보다 더 붉은 통한(痛恨)과 회한(悔恨)
의 피눈물이 아롱아롱 맺혔으리라.
신라(新羅)와 당군(唐軍)의 서슬 퍼런 칼날에 목이 베어지는 순간 분수(噴水)
처럼 뿜어진 백제(百濟) 장수(將帥)들의 선혈(鮮血)이나, 집에 두고 온 가족(家
族)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차마 눈을 감지 못했을 무수한 병사(兵士)들 눈동자
에 맺힌 피눈물도 저리 슬프도록 붉었으리라. 또한 전장(戰場)에서 산화(散華)
한 지아비를 따라 비수(匕首)를 들어 스스로 심장(心臟)을 찔러 이승을 달리했
을 수많은 백제(百濟) 누이들 핏방울도 저 단풍같이 붉었으리라.
강제로 누린내 나는 당나라 주구(走狗)들의 품에 안겨 목숨을 부지하기 위
하여 모든 것을 내주어야 했을 백제 누이들이 흘린 하혈(下血)도 저리 붉디붉
었으리라. 또한 신라(新羅) 서라벌에 끌려가 온갖 능욕(凌辱)을 당하면서도
죽지 못해 살았을 백제(百濟)의 누이들 가슴에 맺힌 피멍울이 저리 붉었을
테고, 조국(祖國)을 등지고 바다 건너 먼 왜(倭)로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 일부
백제인(百濟人)들은 봄이면 낙화유수(落花流水)를 보고 향수(鄕愁)를 달래며
저 단풍보다 진한 혈루(血淚)를 흘렸으리라.
서리에 가을이 무르익고 북풍(北風)에 나뭇잎이 붉게 변할 때면 반도(半島)
에 두고 온 피붙이를 그리며 한 잔술로 무너져가는 억장(億丈)을 달랬을 백
제 유민(流民)들의 심정(心情)도 저리 진한 피빛이었을 테다. 또 그들의 무너
진 조국(祖國)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흘렸을
피땀과 흉심(胸心)의 빛깔이 저리 붉었을 것이 분명하다. 패망국(敗亡國)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백제유민(百濟流民)들의 속타는
심정을 어떻게 알 수 있으리.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유치한 수단(手段)으로 삼국(三國)을 통일하는데 앞
장섰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은 지하(地下)에서 어쩌면 크게 후회
(後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라(新羅)는 백제(百濟)를 병탄(竝呑)하고 그 대
가(代價)로 당나라에게 한민족(韓民族)의 기상(氣象)의 표징(表徵)인 고구려(高
句麗)를 넘겨주고 말았다. 비록 지난 일이지만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책임(責
任)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
수 만리 만주대륙(滿洲大陸)을 호령(號令)하던 배달민족(倍達民族)이 겨우
김장독 같은 삼천리(三千里)의 한반도(韓半島)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영
어(囹圄)의 처지(處地)로 전락(轉落)한 참담(慘憺)한 사건(事件)은 천추(千秋)의
한(恨)이 되어 두고두고 가슴 칠 일이다. 한때의 잘못된 전략(戰略)으로 인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지 못하고 오랜 세월 오랑캐들을 상국(上國)이니, 아버지의
나라니 하며 사대(事大)를 해왔다.
그것은 먼 후손(後孫)이 늘 체증(滯症)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理由)이기도
하며, 옛 백제 땅을 밟으면 천근(千斤) 바위로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한 역사의
큰 짐이기도 하다. 선운산(禪雲山)은 백제(百濟)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서
백제(百濟)를 추억(追憶)하지 않고서는 선운산 정서(情緖)를 제대로 체득(體
得)하지 못할 듯 싶다. 젊어서는 타의(他意)에 의해 자주 신라(新羅)를 품었었
다.백제를 가슴에 안고서 부터 백제는 나에게 많은 눈물과 한숨을 요구하였다.
북방(北方)의 오랑캐들은 요즘 들어 수시로 허망(虛妄)한 논리(論理)로 천년
(千年)이 훨씬 지난 일을 들먹이며 우리의 가슴 아픈 곳을 자극(刺戟)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며, 뉘 집 개가 달보고 짖
는 소리란 말인가? 고구려(高句麗)가 당나라의 변방(邊方) 제후국(諸侯國)이라
니? 이 무슨 저승에서 들려오는 잠꼬대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들의 목적(目的)은 고토수복(故土收復)이라는 명분(名分) 아래 한수이북(漢
水以北)을 자신들의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려는 무서운 음모(陰謀)의 사
전포석(事前布石)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콩 한 톨을 놓고 서로 먹기 위하여 이
전투구(泥田鬪狗)하는 사이에 오랑캐들은 수십 년 전부터 그럴듯한 공작소(工作
所)를 차려 놓고 칼날을 갈고 있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떡 한쪽을 두고 후안무
치(厚顔無恥)하게도 이웃 사촌(四寸)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 대고 있다.
오래 전 부터 가슴에 백제(百濟)의 선운사(禪雲寺)를 품고 있었다. 천 오백
년 동안 온갖 풍상(風霜)을 겪으며 묵묵히 백제인(百濟人)의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천년사찰(千年寺刹)의 면모(面貌)에 흠모(欽慕)의 정(情)이 간다. 오히려
뒤늦은 발길에 후회(後悔)스럽다. 늘 보아오던 이웃집 아저씨 처럼 고색창연
(古色蒼然)하면서 세월의 이끼가 낀, 일주문(一柱門)에 걸려있는 도솔산선운
사(兜率山禪雲寺)라고 쓴 편액(扁額)이 손을 내밀었다.
선운산(禪雲山)은 원래 도솔산(兜率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개명(改名)되었
다. 산세(山勢)가 그리 험준하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절
개가 굳은 청상(靑孀)의 모습이다. 올봄에 족적(足跡)을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구면(舊面)이라면 추상(秋霜)에 곱게 물든 백제(百濟) 아낙의 수줍은
자태가 더욱 가슴 아련하게 다가왔을 것인데.
이루어 질 수 없는 남녀의 슬픈 전설(傳說)을 간직한 상사화(相思花)가 흐드
러지는 중추절(仲秋節) 쯤에 왔었더라면 먼 데 나간 지아비를 맞이하듯 선운산
(禪雲山)은 나그네를 백안시(白眼視)하지 않았을 텐데. 저간(這間)의 그럴듯한
핑계를 들먹이며 송구(悚懼)한 마음으로 선운산(禪雲山) 산신령(山神靈)에게
엎드려 용서(容恕)를 빌고 나서야 무거운 짐을 약간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여래(如來)에게 문안(問安)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고 백제여인(百濟女人)의
숨결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
라’를 입에서 수 없이 되뇌었다. 정읍사(井邑詞)에 읊조리는데 몰입(沒入)되어
먼 장터에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낭군(郎君)을 언덕에 올라 달을 보며
낭군(郎君)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비는 지어미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었다.
또 동으로 신라(新羅)와 맞대고,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대치(對峙)한 나라
의 운명(運命)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 돌아올 날짜가 지나도 돌아
오지 않는 지아비를 그리다 선운산(禪雲山) 꼭대기에 비련(悲戀)의 망부석(望
夫石)이 된 백제(百濟) 어미의 까맣게 탄 가슴을 안아 보고 싶었다. 숯덩이가
된 지어미의 심정은 지아비를 향한 변함없는 붉은 지성(至誠)으로 고목(古木)
에 단풍(丹楓)으로 피어나 갈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觀音妙智力(관음묘지력) 관음보살의 오묘한 신통력은 能救世間苦(능구세간고)
능히 세상의 고통에서 구하시네. 具足神通力(구족신통력) 신통력을 두루 갖추
시고 廣修智方便(광수지방편) 지혜의 방편을 널리 닦아 無刹不現身(무찰불현
신) 세상 어디라도 나투시지 않는 데가 없네.
대웅전(大雄殿) 앞에 세워진 석탑(石塔)을 돌며 백제의 원혼들을 달래주었다.
키가 훌쩍 커서 하늘에 닿을 듯 감나무도 탐스러운 홍시(紅枾)를 매달아 놓고
잎사귀를 모두 훌훌 떠나 보내고 창공(蒼空)을 향해 서서 합장(合掌)하고 있었
다. 탑돌이를 마치고 임께서 계신 대웅전(大雄殿)에 들었다. 은은한 미소(微笑)
를 머금고 인자하신 모습에 안도(安堵)하였다.
석존(釋尊)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께 공양(供養)을 올리면서 적군(敵軍)의
칼날에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비명(非命)에 간 백제(百濟)의 혼백(魂魄)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또 다시 간청(懇請)하고 있을 때 갑자기 환청(幻
聽)으로 들려오는 비명(悲鳴)에 놀라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하늘은 무심할 정
도로 푸르다 못해 손을 휘저으면 파란 물감이 손에 묻어 날 것 같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四方)을 두리번 거리며 허탈(虛脫)한 심정으로 극락교(極
樂橋)를 건넜다.
계곡(溪谷)으로 들어서자 십년 가뭄에 대우(大雨)를 만나듯 시커먼 고목(古
木)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단심(丹心)들이 삭풍(朔風)에 몸을 맡기고 허공
(虛空)을 향해 무리를 지어 비상(飛翔)하고 있었다. 아, 살벌한 북풍(北風)이
백제(百濟)의 혼(魂)을 데리고 가는구나. 만추(晩秋)의 태양(太陽)이 중천(中
天)에 이르렀을 때 나는 백일몽(白日夢)을 꾸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고있음
에도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나찰(羅刹)같은 나당(羅唐)의 병졸(兵卒)들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붉은 낙화
(落花)가 되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진 망국(亡國)의 여인들 울음소리가
허공(虛空)을 가르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창공(蒼空)을 향해 안타
까운 심정으로 손을 흔들기도 하고 두 손을 합장(合掌)한 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물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홍엽(紅葉)을 주워들고 하늘을 우
러러 보며 외쳤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어째서 백제(百濟)의 신화(神話)를 멈추시었나이
까? 다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인 채 오랑캐 말발굽 아래 짓뭉개진 원혼(寃魂)을
어떻게 달래야 합니까? 천 삼백년이란 장구(長久)한 세월이 흘러도 이승을 떠
나지 못하고 구천(九天)을 헤매고 계실 백제의 원혼(冤魂)들을 무엇으로 달래
야 합니까? 이 녘의 소원(所願)은 백제(百濟)의 찬란한 부활(復活)이며, 원혼들
의 신원(伸寃)이랍니다.
임께서 이리 늦가을에 억울하게 역사속으로 사라진 백제(百濟)의 단심(丹心)
을 보이시어 미거(未擧)한 후손(後孫)들에게 경계(警戒)로 삼게 하시는 뜻을
각골난망(刻骨難忘)하여 오래 받들겠나이다. 하오나 무서리에 맞겨 일편단심
(一片丹心) 한번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억울하
게 운명을 달리한 원혼들을 위무(慰撫)해 주소서. 또 다시 이 땅에서 피 맺힌
원성(怨聲)이 난무(亂舞)하지 않도록 굽어 살피소서.
백제(百濟)는 인도(印度)의 한 귀퉁이에 존재(存在)했던 이국(異國)이 아니
라 저희 조상(祖上)님들의 나라였으며, 지금 이곳 고창(高敞) 고을 선운산(禪
雲山) 자락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면면히 그 온기(溫氣)
가 이어지고 있나이다. 백제(百濟)는 슬픔이 아니라 당당했던 대제국(大帝國)
이었으며, 찬란한 문화(文化)를 간직했 우리의 선조(先祖)들이었습니다.
이제 이땅의 모든 후손(後孫)들 가슴에 백제(百濟)의 열정을 붉게 물들여 자
손만대(子孫萬代)에 자랑스러운 역사(歷史)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소서. 비록
달콤하지는 않지만 소인(小人)이 작은 정성(情性)의 표시(表示)로 갈주(葛酒)
한잔 마련하였으니 혼령(魂靈)들께서 흠향(歆饗)하시어 이승의 번뇌(煩惱)를
잠시 잊도록 도우소서.
- 창작일 : 2010.11.13. 14:00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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