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연인들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자 결코 가보고 싶지 않은 연애의 벼랑, 바로 실연이 아닐까 싶다. 실연은 어느 날 느닷없이 그녀 혹은 그가 건네주는 이별통지서로 시작된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이었는데, 그리도 다정했는데, 화석처럼 굳어진 연인의 눈빛엔 어느새 애틋함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차가운 바람만 씀씀 분다. 다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마음을 확인하며 이윽고 질질 끌려가는 처량한 이별인 것이다. 밥맛의 실종, 울화의 시작, 심각한 우울증을 수반하는 나쁜엑스가 바로 실연이다. 그러니까 실연은 합의한 결별처럼 둘이 하는 것이 아닌, 혼자 남은 한 사람이 세월을 건너가며 연정을 수습해야 하는 서럽고도 분한 별리別離다. 그리고 명백한 슬픔이다. 흔히들 실연당했을 때 초콜릿이 도움을 준다고도 하지만 초콜릿복용은 반대다. 애써 감정을 비비고 문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슬프면 슬픈대로 며칠 앓아누워 왜 실연해야 했는지 돌아보며 마음이 타들어가는 사랑의 종말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은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이라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비유는 그래서 적절하다.
세상은 이런 억울한 이별투성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모임도 있고 심지어 외국에는 실연을 전시하고 위로받는 박물관까지 생겨났다. 마침내 사랑을 잃은 사람들이여, 크로아티아로 가라. 아드리아해 동부 해안, 도시 전체가 약속처럼 붉은 지붕으로 엮이고 지중해의 곰살맞은 바람이 머리결을 춤추게 하는 크로아티아 자그로브에 실연의 상처들을 진열하고 가슴을 다독이는 실연박물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저마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비밀처럼 묻히는 앙코르와트와는 대조적이다. 이 실연박물관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피하는 것보다 마주보며 이겨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공감의 카타르시스는 위로와 회복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실연을 경험한 이들에게 기증받아 전시되어 있는 행복했던 시절의 각종 '연애의 산물' -가령 로맨틱하면서도 정열이 가득 담긴 연애편지, 연인에게 받은 인형이나 반지- 들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기 실연의 어떤 사연 하나를 회억하게 할 것이다. 어찌보면 실연은 도처에 산재한다. 반드시 사랑하는 연인에게만 받는다고 볼 수도 없다. 숱한 관계와 열정과 그대들, 그리고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삐져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그렇다. 언젠가 실연을 주기도 했으며 받기도 했던 것이다. 실연박물관의 그 헛헛한 흔적들을 어찌하랴, 우리들의 중세는 온통 사랑뿐이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