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부. 아무것도 없다.(1) - to. my dear..
'I have a private party.. nobody here.....'
"여보세요... 응... 응... 그래 고마워..좋은 하루보네.."
가까스로 눈뜬 나의 시야에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하얀 천장 한가운데 붙여져있는 바다사진.. -사실 바다만 나와있는 대형 사진이나, 벽지를 구하고 싶었는데 결국 구하지도 못하고 겨우 달력만한 크기의 바다사진으로나마 그 대신을 해두었다. - 밤새 켜두었던 전기장판을 뒤로 하고서 일어난다는게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전기장판보다 수십, 수백배 정도 (계산조차 귀찮다) 비싼 학교 등록금을 위해서 몸을 일으켜본다. 터벅터벅..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 충분히 시원해져 있을 물병을 잡아 벌컥벌컥 들이키자 조각 조각 흩어져 남아있던 잠조각들이 물줄기를 타고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문득 어제 몇시간이나 잠들었는가를 생각해보니 갑자기 없던 피로마저 생겨나는듯 하면서 벌써 1년이나 이어져온 불면증에 씁쓸함, 괴로움, 서러움이 뭉쳐있는 한숨을 허공 속으로 흩뿌려본다.
화장실의 불을 켜고 들어가니 쌀쌀해져있는 온도에 저절로 몸이 움츠려 진다. 슬리퍼에 두발을 끼우고 변기로 걸어가 뚜껑을 열어 아까마신 물에 쓸려내려져 방광쪽에 몰려있을 잠조각들을 흘려보내준다. 이제야 정말 잠이 깨는 기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뭔가 씁쓸한 기분이다. 세면대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 까닥 가져다 대면서 물온도를 맞추어보는 습관 -언젠가 내방에서 자고간 그녀는 부모님이 수도공사에 다니냐면서, 내옆에서 양치하다 말고서 직접 물온도를 과감하게 맞추어 주었다 -은 사실 물온도를 맞추기 위한 목적만큼이나 물줄기가 손가락을 따라 휘어지는것이 좋아서 해보는 그저 그런 습관일 뿐이다. 머리를 세면대에 넣어 그 위로 물줄기가 흐르게 한다. 뒤통수에서 시작되어 불규칙적으로 머리를 적셔오는 물줄기에 머릿속에 가득했던 잡념들이 쓸려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지금 이 세면대 밑으로 내려가는 물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은 쓸곳이 없는 물일것만 같다. 가장 지독하게 고여있던 폐수.
'I have a private party.. nobody here.....'
두 번째 모닝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전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응... 응... 그래 고마워..좋은 하루보네.. "
시작이다.
나는 하루 중 집밖으로 나가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나 자신과의 마주함에서 벗어나 다른 것, 사물, 소리, 빛들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고통이 매일 밤 나를 찾아온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분. 이 기분은 단순히 기대감일 뿐이고 실망감으로 집으로 향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상쾌해 지고 싶다. 아파트 단지에서 고갤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점없이 파란 하늘이 시야에 들어와 기분은 더욱 더 상쾌해진다.
자취하는 곳에서 학교까지는 도보로 10분정도로 가까운편 이지만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니 누군가에게 모닝콜을 부탁해두지 않으면 지각하기 십상이다. 불면증이 시작된것은 대학 1학년이 끝나갈 때 즈음 시작되었는데, 어느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차기 시작하더니 도저히 잠들수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무슨 잡생각을 그렇게 오래하는지 스스로도 깜짝 깜짝 놀랄정도로 머릿속에는 무언가 늘 가득차 있는데, 그럼에도 그것이 포만감보다는 공허함에 가깝다는건 재미있는 일이다. 10대의 전부에 걸쳐 꿈꿔왔던 지금의 순간들이 이렇게까지 텅빈것 이였다면 애초에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를텐데...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찾기위해 들어온곳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착해있는 곳이니까... 도망치는 나에게 어떤곳이 의미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또 다른 장애물이 되어 도망치고 싶어질뿐 안식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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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번호 ... ... 님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새하얀 눈이 덮여있었다.
하아..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일다가 다시 대기속으로 스며든다. 이것으로 무려 12년이나 기다렸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기쁨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것이다. 그렇게 그해 겨울, 나는 대학에 합격하였고 형식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의무교육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집이 지방이였던 나로서는 서울로 떠나면서 어쩔수 없이 가족과는 이별하게 되었는데, 사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헤어짐의 아쉬움보다는 대학생활이라는 그 새로움에 내 감정 상태는 기쁨쪽으로 치우져 있었다. 해방감과 기대감이 상충작용을 일으켜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나를 위해 박수를 보내는듯 했다. 나의 12년이 실패하지 않은것 같았고, 미안하게도 대학 입시에 실패한 친구들과 나는 전혀 다른 길을 보장받은듯 하여서, 누가 뭐라해도 승리했다라는 성취감이 가득했다. 내게 남겨져 있는것은 위로. 보상. 즐거움. 행복.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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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 않았나?"
"네! 여기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잡생각에 빠져있었다. 대답을 끝내고나서 얼른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거시경제학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펼쳐 보인다.
대학의 강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지치기와 다름이 없다. 자유를 앗아가는 지독한 가지치기.
오늘 수업시간에는 저자 맨큐교수님과 강단의 교수님이 합작으로 마르크스를 짓밟고 있다. 나는 한번도 마르크스를 만난적이 없는데, 아마 이번학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그의 사진을 창밖으로 던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와 술한잔 먹어보지 못한 후손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까내리고 있는 동안에 그는 무슨생각을 할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사과해야만 할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나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해, 적어도 인간이 아니거나 괴물즈음은 될것이라 생각했다. 절대악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아니면 지독한 바보이거나.. 하지만 내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던 공산주의는 그것이 아니였고, 심지어 마르크스는 그러한 '무식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배움의 공포 또한 알게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공포, 폭력, 철저한 배척정도가 될 수 있겠다.
여기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나는 언젠가 유명한 한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사람의 몸에 흐르는 기에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적이 있었다. 한동안 크게 감명을 받아 있는 상태로 지냈었는데 그것이 무참히 짓밟히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학기 실험수업이 끝나면 의래 교수님과 함께 술자리를 하며 그동안 수고했노라며 잔뜩 술에 취하곤 하는데, 그날도 언제나처럼 쉬지 않고 술잔을 바쁘게 움직였다. 한창 술자리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말이 많아진 교수님의 얘기에 학생들은 기계적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대화의 주제가 교수님 자신의 친구 얘기로 넘어갔는데,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랑 참 친한 친구가 있는데, 정말 똑똑한 놈이였거든? 근데 이자식이 바보가 된거야 바보가."
그때까지 귓등으로 흘려버리던 그의 얘기였지만, 그것은 꽤나 나의 관심이 갔다.
그의 얘기는 이어져 갔는데,
"이자식이 대학을 한의대로 가더니 말이야, 바보가 된거야. 얼마전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는데 내가 속이 안좋다고 그러니까, 몸에 기가 제대로 흐르지 않아서 그렇다고 막힌 혈맥을 풀고 피를 깨끗하게 해야 된다는것야." 라며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거의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입에서 웃음을 뱉어냈다. - 저 무자비한 비웃음 -
"질병에대한 메카니즘은 이미 다 밝혀져 있는데, 기의 흐름이라니 아직도 그런 옛날얘기나 하고 말이야. 여러분들도 화학을 공부하니까 잘알것 아니야? 아직도 그런 옛날 미신같은것에 빠져있는걸 보니까....."
그뒤로도 한참이나 그가 얘기를 이어갔던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밤 나는 밤새도록 속을 개워냈다. 그와 함께 마신 소주가 머리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릴것만 같았다. 내가 걷고있는 이 학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이 저렇게 몰상식하고 폭력적이라면 나는 그에게서 폭력만을 배울뿐이다. 그러니 그와 함께한 것을 개워내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될것이다. 그러니 개워내자.. 개워내자.. 모조리 뱉어내자.
- 나는 한의사와 함께한 기억조차 개워내야 했는데, 아쉽게도 그도 나에게 숫자놀음에 빠져있는 대학의 교수들을 씹어댔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
그날이후 모든 배움은 나에게 공격이 되었다.
맨 처음 내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가지에는 나비도 벌도 새도 다람쥐도 모두다 놀러와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얇고 보호받지 못한 가지들은 부러져 나갔고 그에 반해 남아있는 가지들은 굵어져만 갔다. 이제는 나 스스로도 꺽을 수 없는 이 굵은 가지들은 언젠가 그 수가 점점 줄어들어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변해 버릴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덩어리로 변한것은 너무도 단단한데다 심지어 커져버려서 내 주위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얇은 가지를 부러뜨릴것이고...
어찌할 수 없는 폭력. 무자비함.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는 스스로를 깍아내야 하는데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지금이 또다시 벗어나야 할 고통이 된 것이다. 또 다시 도망쳐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
그해 겨울 나의 기쁨은 하얗게 내리던 눈과 함께 나에게 쌓였다가, 이듬해 봄 이곳에서 따스함과 함께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