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는 오늘도 지치지도 않고 떠오른다.
나는
오랜만에 집 밖을 나가
조심스레 차려입은 코트 깃을 다듬고선
몇 번 가본 적 있는 모임이 열리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간다. 몇몇은 나를 알아보고 조용히
인사하지만, 나머지는 서로 떠들어 대느라
나를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아마 못 봤을 것이리라. 믿어본다.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즐겁다
친절한 사람들과 나는 웃는다
재미있다. 먹고 마시고 노는게.
부대끼며 뒤치락거리는 우리네
삶이, 조용한 대화로 악수하는
진실한 마음들이, 나는 즐겁다.
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많지는 않지만 나와 마음이 맞다고 여기고 또 남도 나를 그렇게 여기기리라고
믿는다. 음, 그래 믿어야지.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인데.
조용히 웃으며 홍차 한잔 집어든다. 여전히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모임이 끝나면 나는 나의 구석진
골방으로 돌아간다. 이 곳은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파아란 빛으로 도색되어 있다.
나는 이 조그만 골방이 너무 좋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죽음보다 적막한
어둠이 저녁 석양을 지워가고있다.
형광등 불빛이 나를 데운다.
나는 낡은 침대에 몸을 던진다.
왜 베이스기타는 독주를 듣기 힘든가.
나는 유명한 베이스 독주 연주가가 되어야지.
두둥 두둥 뜯어가는 중저음이 마음에 든다.
파란 빛 멜로디가 골방 가득 퍼져나간다.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쩌면
이 파란 빛 멜로디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흔 어쩌면 이 멜로디 속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부딛히고 뒤척거릴 수 없는
나의 파란 눈물방울 속에서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즐거움보다 더 바람직한 우울함.
모순일까? 미친 소리일까? 아마 그럴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싶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나는 모임을, 다소간 두려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가끔씩이나마 용기를 내서 찾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음, 저녁은 모임에서 먹고 왔으니 이젠 좀 씻자.
보랏빛 코트를 벗고 파아란 슈트도 가지런히 벗는다.
회색 넥타이를 끌고 검정 장갑과 구두를 정돈한다.
가끔씩 얼굴에 회칠하고 조커처럼 분장해보기도 한다.
뭐 어때? 골방 거울 앞에 앉아 히스 레져가 남긴 마지막 말들을
되뇌여 보면, 어째 정답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구.
따뜻한 물이 잘 안나오니까 샤워하기가 좀 불편하다.
화장실 조명은 늘 그렇듯 마음에 든다.
창백한 3파장 뭐시기 하는 불빛이 퍼져나가는
수증기에, 번지는 물기에 사그라들어가거든.
으, 춥다. 수증기가 골방 벽지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나의 체온을 다 잡아먹어버리는 것 같다.
파란 벽지가 백열등 불빛 아래 춤을 춘다.
회색 사무용 책상 위엔 나의 노트들이 널브러져있다.
온갖 시들은 詩들과 녹아내린 아이디어들이 잠들어있다.
또 몇 줄 끄적거려본다. 밤 하늘 아련한 야경, 슬픈 사람들의 노래, 저녁 노을을 흔들어대는 바람...
아함,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잠이나 자야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즐거움에 담겨진 외로움을.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한자 人 자는 2획을 써서 나타낸다.
나는 어릴 적에 人 을 쓸때 자꾸 ん 을 써버리곤 했었다.
그 버릇이 아직까지 남아 아직까지 글을 갈겨쓸때면 ㅅ도 人도 ん이 되어버린다.
사람 한 명이 기대기엔 나머지 작대기가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쓰러져버렸다.
나는 아마 오른쪽 획이 아닐까.
골방의 밤이 저물어 가고 방의 불은 꺼졌다.
침대는 낡은 듯 끼적거리고 가만히 담배 한개피를 입가에 물어본다.
함께 하고픈 사람, 영혼을 나눈 친구들. 지금껏 나는 찾고 있다.
그래서 내가 모임에 나가는 거라고 아까 전에 말했잖아. 이 인간아.
조용한 카페에서 남들 다 마시는 커피는 마다하고 홍차만 마시고 앉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몇몇은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음, 좋은 사람들이야.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어.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게 있지.
이 모임은 한 사람이랑 세 마디 이상 하는게 금지되어 있는 곳인것 같애.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건진 몰라도, 이상하게 그렇더라구.
세 마디라. 세 마디. 예를 들자면 이런 거 아니겠어.
오늘 아침 날씨가 참 이상하죠?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 요즘 부쩍 늘었네요.
예, 그렇죠? 내일은 우산이라도 챙겨와야겠어요.
이 정도면 내가 수다맨이 된 것 같아서 숨이 막혀오를 정도라구.
잠시 숨을 돌리려고 하면 그 사람은 안 보이더라.
흠, 참 좋은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는
야, 어제 박지성 선수 골 넣는 거 보셨어요?
와, 장난 아니던데요. 이제 이번 시즌 3호골인거죠?
허허. 칼링컵까지 합치면 5호골이라네요. 이번 골은 줏어먹은 것도 아니고 참 멋졌어요.
9시 스포츠 뉴스에서 보여주던데 뭘.
대충 이런 식의 대화면 홍차 한 잔은 다 비워지고
홍차 석 잔이면 만원이나 받기 때문에
차비까지 합치면 이만원이거든. 그래서 그냥 석 잔만 마시자 하고 있으면 모임이 끝난다.
뭐 좋아. 이런 모임. 그런데 영 부담스럽다고 했지?
부담 스러워. 가끔씩 흘끔흘끔 쳐다보는 녀석들이.
왠지 마음에 안 드는 말로 말을 거는 녀석들도 있는데
얘들과는 두 마디 이상 대화하기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아 이런거 나 진짜 싫어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무마시키곤 해. 난 이런 녀석때문에 모임에 가기가 싫어지기도 해.
담뱃불이 다 꺼졌다.
어둠 속에서 뜯는 베이스 독주는 그 맛이 제격이다.
비록 가끔씩 아랫층 아줌마께서 씩씩거리며 올라오기도 하지만.
무슨 돌고래나 박쥐라도 되시나요. 아 참, 그건 고음이지. 베이스는 저음인데 왜 그럴까?
멜로디를 뜯는다.
파랗게
파랗게
파랗게
파아랗게.
눈물 방울이 또 밀려온다.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
어둠에 잠긴 파란 골방 에서
난 파란빛 노래를 부르고 있다.
즐겁다는 건 너무나도 공허해.
외롭다는 것과 우울하다는 것도 공허해? 음. 따뜻한 마음을 난 언제나 찾고 있었어.
따뜻한 마음, 따뜻한 영혼, 따뜻한 만남과 이별, 따스한 눈물...
그 모임에서 난 찾고 있어. 며칠 뒤면 또 모임에 참석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참 이게 신기하더라고.
모임에 갔다 온 날 밤에 뜯는 기타 소리는
왠지 다른 날보다 더 눈물겹게 우울하더라.
눈물겹게.
눈물겹게?
응, 그래. 눈물겹게 말이야.
이제 잘 시간이네. 자야겠다.
잠이야 언제나 잘 오지.
대신 아침에 일어날 때면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게 맘에 걸리긴 하지만.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