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옛 친구의 휴대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달콤한 늦잠을 깨우는 휴대폰 진동음을 박살내버렸을지도 모른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야, 83! 잘 지내고 있냐? / 응... 돼지구나. 그래 너는 잘 지내?
나야 늘 그렇지. 임마, 하, 근데 직장 상사 이 새퀴때문에 짜증나 죽겠다. 정말. /
왜...? 너한테 어떻게 구는데...? /
말도 마라. 아주 정신적으로 괴로워 죽겠다. 정말. 내가 이 놈의 돈만 아니었어도 당장 때려치우는 건데. /응... 그래... 힘들겠네... / 야,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쩝. 오늘 함 나와, 내가 술 한잔 살게. /
술...? 난 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 이 인간아, 그래도 얼굴 함 보자는데.. /
응..? 아 그래... 얼굴은 봐야지 오랜만인데 / 오케이, 그럼 8시까지 성경대 앞으로 나와. 콜 /
뚜 - 뚜 - 뚜 - 뚜 ------....
오늘은 모임에 못 가겠네. 하고 부스스 침대를 탈출한다.
아침에 일어날때면 나의 병은 더욱 심각해진다.
절뚝거리며 부엌으로 기어들어간다. 이래뵈도 꽤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 나의 부엌은.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못할 정도로.
우선 진하게 얼그레이를 끓인 다음에... 방문 밖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1L짜리 우유 팩을 집어들고
슬슬 붓고 난 다음에 단단하게 굳어버린 설탕을 억지로 긁어내서 부으면 내가 좋아하는 모닝티가 된다.
모카 빵이라고 사놨는데 이틀이나 지났다. 좀 걸리적 거리지만 배가 고프니까 우선
차에 곁들여 먹는다. 이 패턴이 나의 위장에는 익숙하다.
파란 방 속에서 빨간 홍차를 마시는 게 나의 눈에는 그리 낮설지만은 않은가보다.
자, 아침을 먹었으니 이젠 일을 할 차례다. 나의 직장 속인 컴퓨터를 켠다.
매혹적인 사이트들이 나의 마우스 왼쪽 버튼을 자극하고 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참아낼 만하다.
가끔씩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은...
출판사에 내 전용 페이지로 이동했더니, 또 처리해야할 자료가 수두룩하다.
아. 제길. 우선 담배 한개피 물고 보자. 라이터의 부싯돌이 또 번쪅인다.
나는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일들은 나에게 정말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료와 요청사항을 담아 가공만 해서 올려놓으면 70만원이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온다.
나의 흐릿한 - 옛 기억 속에서 남아있는 건 오직 이 자료를 가공하는 데 필요한 지식 뿐이었다.
인디 락 이 작업을 할때는 듣기가 좋다. CD가 슬며시 돌아가는 와중에 방 가득히 파란 음악이 퍼진다.
골방의 아늑함을 여기에선 느낄 수 없다. 모임을 나갔다 오면 그 아늑함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하품을 아~ 하고 뱉어내려니 또 병이 도져오른다. 잠시 침대로 가 쉰다.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없었으면 난 정말 큰일 났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이 약은 평생동안 공짜다.
참 애석하게도 마음에 병이 나면 이를 치료하는 약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가 않는다.
하긴 그럴만도 한게,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병이 났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어느덧 저녁이 다 되어간다. 오늘은 내가 정말 열심히 일을 한 것 같다.
남은 문제들은 내일 샘플을 구해서 해설을 달면 되겠지. 하고는 컴퓨터를 끈다.
팅 - 하고 하드디스크와 CPU가 생명을 잃는 순간이면 피로와 공허가 마구잡이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모카 빵이 조금 남아있구나. 하고는 배가 고팠는지 우유랑 곁들어 다 먹어버렸다.
슬슬 방을 치우기 시작한다. 파란 방 벽지에 뭐가 튀면 보기가 안 좋거든.
그런데 무언가가 튀어오르기 시작한다. 아하. 이제 그 시간이구나.
나는 내 방에 있는 유일한 창문이 서쪽으로 나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히 여기고 있다.
저녁 해가 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얼른 후딱 책상에 앉아 펜을 집어든다.
막상 詩라고 제목을 붙이려니까 또 재미가 없어지려한다. 그래도 오늘은 왠지 하나 나올 것 같다.
생각을 해보자.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재미있을까? 생각하려니 해가 벌써 저물어가려한다.
또 막 갈겨나간다. 에잇, 젠장. 이러면 저기 나뒹구고 있는 다른 시들과 차이가 없잖아. 에이...
詩 장난질은 이제 그만하고 기타를 꺼내든다. 두둥 두두둥. 휘파람까지 곁들여 분다. 멋있어보인다.
멋있지? 그래 멋었지. 멋있다구? 응, 그래 정말로. 그래? 응, 그래. 그렇구 말고.
파아란 나의 방에 석양의 그득한 향기가 번져나가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이때부터 나는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자, 이제 슬슬 나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