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야.”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정혜야, 밥부터 먹어.”
다시 들려온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세현 선배의 얼굴이 웃고 있다. 6시 24분. 일어나야 한다. 나는 이불 속에서 아주 느리게 빠져 나왔다. 방 공기가 춥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된장찌개를 끊이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어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밥 먹을 생각을 하니 목구멍에서 신 냄새가 올라왔다. 된장찌개에 두부부침, 그리고 절임을 잘못한 탓에 물러진 배추김치. 역시 입맛이 당기질 않아 창문 너머를 내다봤다.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정혜야!”
“아우, 왜 엄마 소리는 지르고...”
엄마의 목소리는 보통 때도 꽤 큰 편이지만 아침에는 유난히 더 크게 들린다. 귓속이 저릿저릿할 정도다.
“밥상머리에서 넋 빠져 있는 데 그럼! 어휴, 젓가락 하나 지 손으로 놓는 법이 없어. 아주 너는 공주고 나는 하녀냐?”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엄마의 화를 돋울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잠자코 엄마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뭘 또 그래. 그냥 잠이 좀 안 깨서 그래. 나 알바 늦게까지 하는 거 알잖아.”
‘아’하는 소리를 일부러 좀 길게 뺐다. 엄마를 다루는 노하우라고 할까, 애교가 뭔지 모르는
내게는 그것이 최고의 복종법이다. ‘잘 봐주십시오.’ 하는 뉘앙스의.
“그러니깐 호프집 그만 둬. 학교일이 중요하지, 돈 번다고 학교 비싼 등록금 내고선 꼬박
꼬박 졸고.”
“학교에서는 안 졸아. 좌석에서 좀 자고 일어남 괜찮아.”
“괜찮기는. 것보다 식는다. 먹어.”
“잘 먹겠습니다.”
보여주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비웠다. 아침을 먹어야 든든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위장에 납으로 된 추를 매달아 놓은 기분이었다.
“다 먹었으면 그릇 빨리 줘. 얼른 설거지 해버리게.”
“응.”
그릇을 건네고 나는 반찬뚜껑을 덮고 식탁을 정리했다. 아침에 한 소리 들은 것도 있고
해서 바로 일어난다는 게 사람 된 도리는 아니지 싶어서였다.
“정혜야.”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행주질을 잠시 멈췄다.
"응? 왜?"
“너는 이해해 주겠지?”
엄마는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가래처럼 걸쭉한 것이 걸린 사람처럼.
“뭘?”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걸까 나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너는 여자고, 엄마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까.”
어쩐지 심각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이 주는 어떤 불안감이 싫다. 흐름을
바꾸기 위해 나는 되려 유쾌함과 가벼움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렇게 거창해. 뭐 할 말 있어?”
솨아-하고 물소리가 난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손을 그저 싱크대에 두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없어?”
나는 재차 물었다. 솨아-하고 하는 물소리와 라디오의 아나운서 목소리.
“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이상하게 오늘은 좌석에서도 잠이 오질 않았다. 햇살이 눈구멍을 쑤시는 것 마냥으로 비
추는 탓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사랑하는 사람. 이상할 거 있나. 청상과부 외로운 엄마가
사랑을 찾아서 산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다. 오히려 축하를 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느낌이 이상했다. 사랑. 파마머리. 사랑. 호피무늬 티셔츠. 사랑. 습진.
아니, 지금은 자야만 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엔진이 울리며 다시 창문이 덜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침에는 꽤 쌀쌀 하더라니 학교에 도착하니 약간 땀이 배어나올 정도였다. 피곤한데
날씨까지 이렇게 극과 극이라니 감기에 걸리기 딱 십상이다.
의외로 수업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감이 있어 느긋하니 매점을 찾았다. 커피라도 좀
마시면서 잠을 깨워볼 참이다.
“정혜야.”
“엄맛!”
그 순간 나는 커피를 쏟았다. 손에 뜨거운 것이 닿자 순간적으로 컵을 놓쳐 버렸다.
“아 뜨거…어후, 놀랬네.”
하나였다. 그 애는 가방을 뒤적뒤적하더니 휴지를 뽑아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왜 그렇게 놀래. 어휴, 하여간 많이 쏟았네. 괜찮아? 옷에 얼룩 다졌네.”
“뭐, 휴지로 닦으면 되. 너도 시간 때우러 온 거야?”
“그렇지 뭐. 내가 너무 성실해서 나도 피곤해. 왜 이렇게 일찍 도착한 거야?”
“잘난 척은? 나도 내가 성실해서 피곤하다. 피곤해서 그냥 엎어져 자고 싶다.”
“강의실에서 자. 대신 뒷일은 책임 못 지지만.”
“악마. 야, 슬슬 가자.”
“아, 가자.”
수업은 언제나 그렇듯 1920년대의 케케묵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반짝이는 재치랄지
유머역시 1920년대부터 먼지가 쌓여 온 것 같은 저 교수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몽상에 젖었다.
저런 교수도 사랑을 하는 거다. 백발을 휘날리는 저 노교수에게 어떤 여성이 조심스레
유자차를 권한다. 온화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대화. 아마 그것이 황혼에 걸 맞는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 교수가 발가벗고 침대에 뒹구는 생각을 했다. 함께하는 여성은 어느
정도 나이 대일까? 철없고 돈 밝히는 20대? 아니면 노교수 나이만한 예순의 노파? 20대
라니…오한이 들 정도다. 평소엔 저처럼 따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뻘겋게 번질거리면서
야한 농담을 지껄이거나 자신이 원하는 기묘한 체위를 요구한다든지.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내가 꾸벅 하고 인사를 할 때 저 노인네가 내 허벅지를 보며
그따위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니…
어쩐지 여태껏 교수님에게 느꼈던 존경심이나 엄숙함은 사라지고, 어떤 혐오감이 내
온몸을 주물럭거렸다. 노인 특유의 체취, 지나치게 높은 체온.
“…역시 싫어.”
엄마 역시 그런 걸까? 아니, 그런 상상은 말자. 엄마는 엄마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푸르르
떨었다.
지하철은 한산했다. 하긴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지하철에는 노인이나 주부들이 간간
히 있었다. 어린애들 재잘거리는 소리. 나는 이어폰을 꼈다. 한 십분 쯤 갔을까.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사다 지로의 것이어서 어쩐지 슬프고 애틋해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실상
책이 아니래도 나는 울 이유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눈물이 속눈썹을 적셔 들
어가고 있었다.
톡, 톡
막 울어 볼까 하는 찰나에 웬 손가락이 책 위를 두드렸다.
“어?”
세현 선배였다.
“되게 열심히 본다.”
“에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선배의 눈은 왜 이렇게 나를 똑바로 보는
걸까… 나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데.
“어느 쪽으로 가?”
“전 뭐 타다가 좌석으로 갈아타는 건데요.”
나는 전광판을 봤다. 역이 몇 개가 남은 걸까. 점점 책장을 쥔 손바닥이 축축해 지고 있
었다. 이건 착각, 오만, 건방짐… 여기서 지금 내 머릿속을 돌고 있는 만화책 같은 상상에
나는 혐오를 느꼈다. 우연 하나에 이렇게 손바닥이 젖는 여자. 인기 없는 여자. 못생긴
여자…. 주제를 파악하라고 머리는 속삭이고 있었다. 애써 옆에 앉은 선배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책장이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어디서 타는데? 버스 혼자 기다리면 심심하잖아.”
“아뇨, 이거 있잖아요.”
나는 책을 들어보였다. 하필 왜 책은 이렇게 우중충하니 바래버린 것일까. 공부벌레, 여자
가 아니라 나는 벌레.
“오, 아사다 지로. 군대 있을 때 고참이 좋아하던 작간데. 그 작가 좋아해?”
“네, 뭐….”
“아, 난 내린다!”
“예? 아 잘 들어가세…요.”
뒷모습이 다 사라지도록 보고 싶었지만 지하철은 그의 뒷모습을 두고 다시 내달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슬픈 마음은 멈추지가 않았다. 왜 그렇게 그 사람은 무심히 나설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남자 하나를 잡아놓을 매력 하나가 없다는 말인가. 오늘따라 어쩐지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는 모두 남녀가 다정히 서있었다. 날이 추운 탓인지 여자들은 하나 같
이 남자의 외투를 파고든 채로 그대로 순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처럼 그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여자는 하나같이 웃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남자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에 빛이 나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보석함 속에 고이 모셔진 오색찬란한 보
석과 같이 품에 안겨있는 여자들.
내가 알던 엄마도 추위가 온다면 저처럼 남자의 품에 안겨 그의 보석과 같이 눈부신 미소
를 보일 것인가. 파마머리에 기미가 있고 거친 목소리를 지닌 그녀가 어느덧 사랑에 연마된
다이아가 되었단 말인가.
“어째서 혼자 행복할 수 있냐고.”
나는 참아온 눈물이 떨어졌다. 얼어있던 얼굴에 눈물의 온기가 불타는 듯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슬픈 마음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아무도 없길
바랐건만 엄마는 눈치도 없이 오늘따라 집에 일찍 와 있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아르바이트 없는 날이니?”
“응.”
대답하기가 싫었다. 쉬는 날 학교 마치자마자 집에 오는 딸은 오로지 부모만 좋아하는 인
간상이다. 그나마도 아마 이십대 중후반이 되면 부모마저 한심하게 보는 인간이 된다. 연애
를 하는 엄마는 왜 오늘 집에 일찍 온 걸까. 놀리는 거면 그만 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
다.
“밥은 먹었어?”
또 밥. 거기서 무언가 머릿속이 삐걱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밥 먹을 사람도 없어서 굶고 다닐까봐?”
엄마는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러나 평소에도 내 말투는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에 엄마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엄마 오늘 옷 샀는데 볼래?”
나는 짜증이 났다. 엄마는 내게 친구 같은 살가움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자신도
여자라고 하는 엄마 자체가 싫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을 내게 과시
하는 것으로 밖에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옷? 좋지. 뭐 샀는데?”
“응, 세탁소 갔는데 이게 있더라고. 첨엔 너무 야하다 싫어서 됐다고 하는데 굳이 싸게 판
다고 그래서. 입으니까는 좀 덜 야한 거 같기는 한데, 넌 어때보이려나. 잠깐 있어봐.”
엄마는 다행스럽다는 듯이 유쾌한 말투도 안방에 들어갔다. 지금 나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엄마를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저 웃고 있는 얼굴, 방심하고 있는 얼굴에 온갖
못할 말을 뱉어주고 싶다. 제 딸에게 자신의 행복이 얼마나 추악한지 돌팔매질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어때?”
옷을 입고나온 엄마는 내 눈에는 그렇게 야해보이질 않았다. 팔뚝만 망사로 된 그 옷에는
온갖 레이스가 붙어있었고 그것은 마치 남자는 넥타이, 여자는 리본처럼 자신이 여자라고
표시해주는 안타까운 상징물처럼만 보였다.
“예뻐. 잘 어울리네.”
“안 야하니?”
“야하기는, 거리 돌아다니면 다리 새하얗게 내놓고 다니는 여자들 많아. 그게 야한 거면 세
상에 입고 다닐 옷 없어.”
“아우, 그럼 다행인데.”
“다행은 무슨.”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렇다. 엄마는 그저 옷으로만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엄마한테 잠시나마 열등감을 느끼다니.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Why do bird suddenly appear. Every time, you are near…."
“기분 좋은가 보네, 콧노래 부르는 게.”
“뭐 기분 좋아야 노래 부르나. 그냥 생각나서.”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불쑥불쑥, 노크도 없이… 나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넌 나이에 안 맞게 케케묵은 노래 좋아하더라, 근데. 카펜터즈면 나 처녀 때 아냐?”
“그게 뭐.”
“요즘 노래 싫어?”
요즘 노래라. 그러고 보니 엄마의 벨소리는 늘 최신 곡이었다. 난 들으면 질려버리는 가요
같은 거 벨소리로 하는 게 질색인데, 엄마는 꼭 음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노래
를 좋아하신다. 걸, 걸, 유고 걸. 데레데레뎃, 뎃, 뎃 걸.
“질려. 차라리 목소리 잔잔하니 그런 게 좋아.”
“촌스럽기는.”
엄마는 내 방을 나가버렸다. 아마 재미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다음 곡은 유키 구라모토의 Paris Winter였다. 파리라는 도시는 참으로 고적하고 외로운
이들의 도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딕양식의 건물들을 보며 마음에 일어나는 슬픔으로
눈가가 젖은 어떤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외롭다. 그 우울하고 정결한 세계를 보며
겨울의 바람 속을 걸어가는...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리고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유행가를 좋아한다. 때때로 엄마 차를 탈 일이 있을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차 시동도 걸기 전에 요란한 노래들을 틀고는 했었다. 그건 애들이나 듣는
거라고 해도 엄마는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 엄마의 세계는 늘 그토록 시끌벅적 했다. 그녀에게 고딕의 세계는 어떤 동요를 줄
수 없다. 오로지 엄마의 세계는 촌스러울 만큼 원색으로 빛났다. 그 누군가의 눈에도 들어
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 누구라도 볼 수 있었을 거다.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맘이 아니었다. 아까 세현 선배와의 일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머리를 비워야지, 나는 욕실로 들어가 잘 준비나 하기로 했다.
욕실의 조명은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머리를 감고 양치질을 하려는 순간 뿌연 거울에는
내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거울을 수건으로 닦았다. 얼굴이 길어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
굴. 쌍꺼풀이 없고 여드름이 불긋불긋한 볼. 깡마른 몸 때문에 메마른 가슴. 지나치게 커서
연약해 보이지 않는 키.
여기 이 척박한 몸 어딘가에 여자라는 신비한 생물을 기르고 있다는 것일까. 조금 낮은 목
소리에 지나치게 분석적인 사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말투가 안 되는 냉소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전혀 귀엽지 않다.
그저 멍청하고 잘 웃고 눈이 큰, 뽀얀 피부의 자그마한 여자애였으면 좋았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다니는 하나처럼. 나처럼 세현 선배를 사랑하는 그 아이처럼. 말리지 않은 머
리 끝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는 모든 사람이 옷을 벗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옷을 입고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람의 옆에는 서로의 옷이 되어주는 이들이 있었고 나는 없었다. 엄
마가 지나가고 세현 선배가 지나갔다. 낮의 노교수와 온갖 귀엽고 섹시한 여자들이 지나가
고 있었다.
바라보지 마. 나는 잠에서 깼다. 베개는 이미 한 켠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새벽 4시 50분. 나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이 말랐다. 최대한으로
차가운 물을 마시고 아직 부끄러움과 분함으로 뜨거워진 가슴의 열기를 쓸어내고 싶었다.
방문을 나서 나는 냉장고를 열려던 참이었다. 어쩐지 안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도 엄마는 자지 않는 것일까, 나는 텔레비전이라도 켜놓고 주무시는가 싶어 방문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엄마의 목소리였다. 짐짓 하소연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호기심이 들었다. 이 시간이라면 엄
마가 말한 그 남자뿐이겠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래, 말했어.”
아마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응, 지금 상태라면 괜찮겠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자신들의 사랑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거라고만 믿고 있
는 눈치였다. 바보 같은 년.
“몰라, 뭐야 내가 남의 집에 도둑질 온 것도 아니고. 이 시간에 몰래 전화나 하고 있고.”
말투에는 애교가 넘쳤다. 평소의 엄마는 좀 목소리가 무뚝뚝하다 싶을 정도로 톤이 일정 하
고 나지막한 편이었다. 화가 날 때는 귀가 얼얼할 만큼 날카로웠는데. 지금 듣는 이 목소리
가 정말 엄마가 내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서는 웃음소리가 나기도 하며 화기애애한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남자는 엄
마를 어르기도 하고 농도 치는 모양이었다. 입에서 신 내가 났다.
“응, 오늘 자기가 사준 옷 너무 좋지. 딸애도 예쁘다고 했어.”
하, 나한테는…. 나는 왠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속으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나
에게 그걸 보여줬던 걸까.
“그치 뭐, 애가 근데 좀 고지식해서…. 좀 꾸미기도하고 놀기도 하고 그럴 것이지, 다른 애
들은 난리던데.”
얼굴이 붉어져왔다. 겨우 여자행색만 내는 저런 여자한테까지 내가 경멸의 대상이었나. 이
제는 방문을 부수고 저 여자를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만들면 미친 듯
이 웃으면서 너나 잘하라고 외칠 것이다.
“몰라, 그래도 착해서.”
저 여자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정말 저게 내 엄마가 맞는 것일까. 늘 아침마다 밥은 꼭 먹
으라던 내 엄마가 맞을까.
“정말 가끔은 딸애가 없었다면 그런 생각해.”
나는 더 이상은 들을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문을 열어 제꼈다.
“없으면 어쩌고 싶은데?”
엄마는 내 갑작스런 등장에 적지 아니 놀란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얼른 내려놓고 엄마는 그
상태로 얼어있었다.
“왜, 남자랑 있으니깐 재미가 좋아? 나 없으면 저녁이 아니라 내내 전화하면서 좋을 텐데
내가 있어서 그렇게 신경 쓰였어?”
나는 마치 바람을 피다가 덜미를 잡힌 남편을 대하는 본처와 같이 굴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부부였다. 서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느낄 수밖에 없던 남자의
부재를 필사적으로 메꾸어 주던 사이였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배신해서는 안 되는 것
이었다.
“어, 내가 그렇게 부끄럽고 싫었어? 내가 웃고만 있으니깐 병신 같아?”
눈물이 흘렀지만 나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악몽으로 뒤척이던 이 밤에 당신
이 내게 무슨 상처를 입혔는지 보라고 나는 눈물 젖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심
장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 불이 피를 타고 내 몸에 넘실거리며 흘러 다니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엄마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건조하게 갈라지는 소리. 아까의 활기는 어디로 가고 겨우
목구멍을 뚫고나온 듯한 목소리는 어쩐지 거슬렸다.
“변명할 생각 마. 내가 다 들었어!”
나는 엄마를 몰아세우고 싶어졌다. 잘못했다고 말해. 나는 엄마가 눈물로 비는 것을 보고야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비굴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나는 혼자
불행해지지 않겠다고.
“그래,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했어, 응?”
나는 다시 캐물었다. 어서 더러운 속내를 내보이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 정말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래, 나 전화했어.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내 친구야.”
이 여잔 나를 속이고 있다. 나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아. 이 여자는 배신자다. 난 안 속아.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주 지겨워. 매일같이 웃으면서 나 무시하고 있었던 거 다 드러
났는데 둘러댄다는 소리가 친구야?”
“친구라고! 그래, 나 사랑하는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이랑은 전화 못해!”
“무슨 소리야?”
“넌 몰라.”
“내가 뭘 몰라, 엄마 입으로 다 말하고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 유부남이야.”
엄마는 그 말을 하는 순간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
는 거야. 행복한 사랑으로 날 약 올리던 거잖아. 그 먼 세계로 자기 혼자 훌쩍 떠난 게
아니었던가.
“지금 전화한 사람은 그 사람이랑 나 연결해주던 사람이야. 나 이혼하고 그런 처지 이해해
주고선 같이 산이라도 타자고 하면서 그렇게 지내던 사람이야.”
그러면서 엄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산악회에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며 고민했던 이야기들.
“내가 처음 한 생각이 네가 날 얼마나 더럽게 생각할까 그거였어.”
엄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 그 사람 부인한테 헤어져 달라고 했어. 근데 웃긴 건 그 사람 부인이 너무 쉽게
그러겠다고 한 거였어. 뭐, 자기도 남편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나.”
코를 훌쩍거리는 엄마에게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로 이미 누군가에게 버려진 찌꺼기들이라 사랑한 거겠지. 그렇지만 너한테 이런 말을 내
가 어떻게 해.”
“왜…….”
“비참했어. 외롭다 못해서 온갖 더러운 짓은 다하는 꼴이 됐구나. 너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건데.”
그러면서 엄마는 몸을 온통 손으로 비벼대였다. 더러운 자신을 닦아내려는 듯이, 아예 지우
개로 지우려는 듯이.
나는 어지러웠다. 내 머릿속에서 키워온 더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는 지금 나 때문에
매일 울고 있는 여자였다. 남들 하는 사랑마저 부끄러워서 이 새벽에 타인과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
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제 안방에는 울음소리만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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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로 쓰게된 단편소설인데
참 문사에 소설을 완성해서 내게 된 건 처음이네요ㅋㅋ
(교수님에게는 박살이 났지만...)
음 소설도 참 재미있지 싶어요.
요즘 한동안 학교생활로 다 잊고 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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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한테 지도 받으며 수정했던 본이 아직 남아있었네요.
그래서 수정버전을 한번 올려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스토리에 뭐 큰변동이 있다기 보다는 테크닉이나 플롯연결
문제이기 때문에 기대하고 보신 분이라면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네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소설을 다시 써봐야 겠습니다.
마음 수련차ㅋ
雪<ゆ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