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부. 소년 이야기
잠이 어렴풋이 깨고 있다. 아마도 이제 곧 어머니가 방으로 나를 깨우러 오시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
하면서 방문을 열기 전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어볼까하고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시간을 착
각하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굳이 눈을 떠보지 않는다. 하지만 부엌으로부터 새어들
어오는 어머니의 아침 준비하는 소리와 아버지가 켜놓은 티비의 소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
음을 알게한다.
인간이 가진 감각과 인지 능력이란 원할때만 발휘할수 있는것이 아니라서 이런식으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고 판단하게 만든다.(쓸데없이 발달되어 있는게 아닐까. 과학이 발전
되서 이런 인지, 감각기능을 자는동안만이라도 off시키는 스위치가 나왔으면 좋겠다)
하아.. 길게 한숨이 나온다.
이미 정답은 나와있지만 이불속에서 나오고 싶지가 않은 것은 과일과 곡물이 익어가는 계절에 걸맞는
포근한 아침햇살과 그와는 전혀 섞일수 없을것 같은 찬공기 때문인데, 창문사이로 우풍이 새어 들어온
다거나 하는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아침이면 환기를 목적으로 집안의 창문을 열어두기 때문에 내 방문
사이로는 이미 스믈스믈 거실의 찬바람이 들어오고있다.
이불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쾌함보다는 내가 밤새 따스하게 만들어놓은 이불안의 온기를 강제로 빼앗기
는 기분이 들어 억울하다.
역시나,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오시며 아침 기상을 알려주시지만 굳이 못들은척 하며 눈을 더 질끈
감아본다. 딱히 눈을 감고 있는다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것도 아니고 1~2분 더 잔다고 피로가 풀리는것
도 아닌데.. 그래도 잠시만 더 이불속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머리를 좀 빨리 감아버리고 가방은 어차피
어제랑 같으니까.. 그리고, 교복도 좀 빨리 입으면 될테고..또 뭐가 있더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어머니는 빠르게 나를 지나쳐 방안의 창문을 활짝 열고서는 손바닥으로
이불을 탁!!하고 치시고는 방밖으로 나가신다. 그제서야 내 머리속의 사고회로는 정지 되고, 상반신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처음으로 두눈을 떠서 이불속에서 상상하던세계를 직접 시야속에서 확인한다.
똑같다.
터벅 터벅,화장실로 걸어 들어가서 변기의 뚜껑을 닫고 그위에 걸터 앉아 앉은채로 다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 시간이 30분이니까 세수하는데 5분..아니 2분이면 되고 그리고 머리는.. 3분만에 감고 젤바르는데
는.. 그냥 오늘은 바르지 말고 갈까.. 배가 고픈건 아니니까 아침 먹는 시간 빼면 10분정도는..............
까지 생각 했을때 쾅!!! 누군가 화장실 문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며 나의
사고 회로는 다시 한번 정지하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세면대의 물을 틀고서 머리를 적신다.
내가 매일 아침, 같은 패턴으로 잡생각에 잠기는 동안에 어머니는 매일 아침 같은 방법으로 나를 학교에 보내고 계신 것인데, 이것은 사실 암묵적인 룰과도 같다.
그런 약속이 있기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잡생각에 잠길수있다고 봐도 무관하겠다. 어머니가 여행을 가
신다거나 친척집에서 하루밤 묵고 오시는 날이라면 나는 어김없이 아침에 허둥대게 되는데, 잡생각하는 내 사고회로가 제어장치 없이 돌고 돌면서 시간을 보내다 지각에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야지만 정지되
기 때문이다.
학교갈 준비를 끝내고 대문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어머니가 어김없이 내게 과일즙을 가져다 주시는
데, 나도 어김없이 '밥도 먹었는데 어떻게 더 먹노?'라며 툴툴 거리며 꼭 마지막 한모금 남겨두고는 더는 못먹겠다 어머니에게 쑥 내밀고 집을 빠져나온다.
사실 이것은 하루중 내가 하는 거의 유일한 타인에 대한 확실하고 무자비한 거절 행위인데, 학교내에서
는 거절 할수있는 일이라고는 조퇴내지는 양호실로 도망가는 것이 전부인 내가 타인에게 거절이라는 행
위를 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무언가를 수용만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잔뜩
받게 하지만 이것은 '어쩔수 없는것'이다.
인간이란 참 이기적이라, (어쩌면 내가 유별나게 이기적일 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상처 받은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하면서 그것을 해소 하기도 하는데, 모든일을 그런식으로 해소 한다고 볼수는 없으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해소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대상은 왜 항상 어머니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것또한 참으로 비겁하기 그지 없
는데, 세상에서 아무리 내 상처를 떠 넘겨도 결코 떠나지 않을것이라는 믿음이 가장 큰 근거가 될수있겠
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거나 보복 당할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조심스러워 지는데,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 원칙에서 예외로 생각되기 때문에 나
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그런 내 상처를 떠 넘겨 버리는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부모님을 가장 사랑한
다고 이야기한다라는것. 사실 부모님을 사랑하는데는 일말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
하며 의지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무자비함도 드러내야 하는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된다.
대한민국 고3과 그의 어머니, 아직 완성되었다고 보기 힘든 자식의 나머지 반을 어머니는 채워주고 있
는것인데, 아마 내가 내쉬었던 한숨은 어머니가 항상 반쯤 덜어내두었던 것이리라.
집밖으로 나와 출근하는 아버지의 차에 탄다. 차 문을 열고 타면 차안에서는 이미 영어회화 테이프가 돌
아가고 있는데, 사실 집중해서 듣는것도 아니고 수능에 나올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항상
아침이면 테이프는 차안에서 돌고있는것이다. 마치 내가 아닌 아버지를 위해 틀어놓은듯이..
그렇지만 이것은 아버지 자신이 보여주는 하나의 애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격하거나 거친 성격을 가지신것은 아니지만 상냥한 표현 방식을 익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서툰것 뿐
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나도 역시 마땅한 대화 주제를 찾지 못하고 침묵하는데, 아침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차에 준비되어 있는 껌을 꺼내서 운전하는 아버지의 손바닥으로 전해주는것이 전부이
다. 매일 아침 그렇게 부자는 껌을 씹으면서 함께 자신의 목적지로 향한다. 차에 준비되어있는 껌은 한번도 바닥 난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게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버지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시후, 나는 학교 정문에 도착해서 담담한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려 걷는다. 아버지의 차는 내가 내린
후에 금새 출발하는데 차가 출발한 이후에 아버지의 차에서 영어회화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을까하는 생
각을 하면서, 교문을 지나 교실로 향한다.
어머니가 나의 한숨 반정도를 덜어주고 계시다면 아버지는 말없이 내뒤에 서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내
힘으로 대지를 밟고 서있는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두손에 의지해서 두발로 서는 연습을 하고 있는것인
데, 단지 서로 모른척 하고 있는것일 뿐이다. 언젠가 나는 깨닫게 될것이다 아버지가 가졌던 꿈과 야망
을 향해 날아가지 못했던 이유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것을, 자신의 두 날개로 떠오르기에는 그 두
날개로 지탱해주어야 하는 내가 있었음에 대지에 두 발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위로는 어머니가 될지언정 내가 가장 이해하며 안타까워 할 사람은 아버지가 될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있다.
교실로 들어와 책상에 앉았을때 칠판 옆의 달력이 눈에 보인다.
누군가 큰 글씨로 D-1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기대되기 시작했다.
......
자유.
그당시 내가 가진 기대감은 자유를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것만 끝나면 나의 진짜 인생은 시작이라고..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던것이 사라졌으니 내 인생은 자유로울 것이다'라는 것이 내 어설픈 가설이였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것은,
자유라는 것이 그 무엇으로 부터의 벗어남에서 오는것은 아니다 라는것을 길게 아파한 다음에 인정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적도 없었고 그저 괴로움에서 편안함으로 가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진 단순한 욕구체 라는것.
그 욕구라는 것은 채워지는것이 아니고 그저 해소되고 다시 다른 꽃망울을 피우는 지지 않는 꽃이며 그 향기에 나는 취해 이리저리 휘둘린다는것.(심지어 같은 꽃망울의 향기에도..)
그것은 내가 최초로 내 스스로의 사고 능력을 저주한 일이기도 했다.
-자유는 자유를 꿈꾸지 않는다-
이한마디가 내게 내려진 최초의 사형선고였고.
그로 인해 내 배는 긴 항해에서 목적지를 잃고 어느 방향의 바람을 타야하는지를 알수없게 되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방향을 잃은 배에게는 어떠한 바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고.
이것이 곧이어 내게 내려진 두번째 사형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