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길가로 나서는 왠지 오랜만의 일이다. 적막한 어둠을 나트륨 가로등이 떠받치고 있다.
어둠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은 나의 익숙한 골목길이 끝나는 구간부터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이라는 익숙한 글귀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없어져버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건물 2층에서 형광등 불빛을 덮고 있는
단과 학원 음악 학원 미술 학원 태권도 학원 종합 학원 들 밖엔 안 보인다. 다 빨려들어갔나보다.
내가 욕할 처지는 못된다. 나도 기생충일 뿐이니까. 쩝,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골방 문 밖에서 몇 층 내려가는 계단에서 하마터면 또 굴러넘어질 뻔했다. 그런 사람이
이 먼 거리를 걸어다닌 다는 건? 어찌 보면 엄살도 굳어버리면 진실이 될 수도 있는게 사람인가보다.
자동차들이 가끔씩 쉭 쉭하고 후면등의 빨간 선을
나의 깜짝 놀란 두 눈동자에 새기고 달아나버린다.
아놔, 그냥 펑크를 내버려. 하고 씩씩거려선 안된다.
그러다가 또 스쳐가는 자동차에 질겁해 넘어져버릴지도 모르거든.
휴, 하고 한숨을 쉬려다가 담배를 떨어뜨려버렸다. 윽 젠장, 아쉽다. 하지만 돈이 궁하니 또 물긴 그렇다.
어느새 큰 길까지 나와버렸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를 타야한다.
버스, 제발 좀 빨리 와서 나를 태워버리길 바란다.
웅웅 거리는 엔진 소리와 타이어 소리들이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나의 귓가에 테러를 가한다,
소름이 돋힐 정도로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날 좀 내버려 둬요. 전조등이 서치라이트처럼 나를 추적한다.
담배가 없어서 그런가. 안절부절 못하며 코트깃을 추켜세운다.
의자에 앉아 계시는 아줌마 두어분이 흘끔 흘끔 나를 엿보는게 보인다.
아니,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혼자서 중얼 중얼 거리고 있대?
아차, 하고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이런 젠장... 하고 애꿎은 코트깃만 만지작 거리고 있자니
드디어 버스가 왔다. 나는 비틀대며 계단을 오른다.
아니 이건 뭐냐. 언제 요금이 올랐어. 하여간에 이놈의... 하며
얼굴 가득 불만을 그려 보이면서 기존 요금에 백원의 팁을 얹어준다.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는 별 관심을 안 가져 주신다.
그저 어서 오세요, 라고 녹음된 듯한 어구를 귓가에 부어주신다.
오늘 내가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따뜻한 말일 것이다.
맨 뒷자리, 여긴 이른바 좀 잘나간다는 애들이 앉는 자리다.
나는 제 2인자인가?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맨 뒷자리 바로 앞에 있는 왼쪽 좌석이다.
여기는 경로석이 아니라서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나타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흠, 마음에 들어.
버스에 보면 이 자리는 쭈그려 앉기 알맞게 뒷바퀴가 튀어나와 있다.
양 손을 포개 무릎을 감싼다. 건강에 치명적인 자세이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이 자세를 좋아했다.
아파온다. 그러나 이젠 참아볼련다. 까짓거 다리 저릴 거는 이미 예감한 일이다.
덜컹 덜컹 대는 창문 너머 풍경화가 지나간다.
도시의 야경,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자동차들, 전조등, 가로등, 고가로, 신호등,
또 뭐가 더 있지. 그런 걸 자세히 생각할 시간은 10km/h의 속력이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지로 내 눈에 각인될 뿐이다. 차창 너머로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인다.
나를 바라보는 건 나 하나로도 족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그렇게....
쩝, 하고 또 습관처럼 입맛을 다시다 보니 성경대 앞이다. 이젠 내려야 한다,
꼭 이럴 때가 되면 뒷문에 엉겨붙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차마 비켜달라고 말하기엔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힘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건 더 민망하다.
이럴땐 쭈볏거리며 스멀스멀 다가가는게 가장 유효하다. 거의 99%는 알아서 비켜준다.
만원버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이럴 땐 세 정거장 쯤은 역주행 해 걸어갈 각오도 해야 한다.
참 바깥 나들이라는 게 힘이 들긴 든다. 응?
그런데 내가 이런 고생을 해 가면서 모임에 가야 하는 걸까?
난 그저 이렇게 쭈뼛거리면서 비켜달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 말고, 그저 나의 우울함의 파란 빛을 나눌 수 있는,
같이 노래 하고 마음을 담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지, 하고 모임에 나가는 거였다.
아직까진 믿고 있다. 다 사람들이 이 버스와 버스 정류장, 길 거리와는 다르게
친절하거든. 응, 그래 친절해. 정말. 좀 있으면 만날 돼지 녀석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지글지글 굽혀져가는 비계 냄새가 우선 내 코를 괴롭힌다.
번쩍 번쩍 거리면서 열심히 새 상품을 광고하고 있는 광고판 들은
네온사인과 나트륨, 3파장 형광등이 실제적 이미지로 남을 추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 정도 까지는 어지럽기는 해도 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빨대 맨들이 춤을 추고 조금만 더 벗었으면 매출을 충분히 늘릴수는 있겠지만
경찰 아저씨들이 당황해하며 수갑을 가져왔을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옆에서 마이크를 쥐고 허리를 실룩거리고 있다. 우리집 컴퓨터에는 좀 더... 아니다.
모니터 속의 사람들에게서는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나는 가끔씩 성경대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가게 앞을 지키는 아가씨들에게서 느끼곤 한다.
저 언니들 몇 시에 퇴근할까...? 일당은 얼마나 받을까...? 집은 어디일까...?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을까...?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부모님은 잘 계실까...?
새벽 해가 밝아올 때 지친 몸을 이끌고 가다가 화장에 번지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저 아가씨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너무 무섭다.
왠지 저 사람이 보여. 더 이상 생각하는 건 나에게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다.
제발 나는 쳐다보지 말아줘. 제발. 나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일 뿐이라구.
그러나 나의 바램은 10m를 채 가질 못한다.
운전 면허 딴지 몇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운전 학원 광고는 크게 바뀌지를 않는다.
나는 정말, 정말 애써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걸었다.
할머니께서 나를 바라보시다 약 2초 뒤에 다른 사람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러나 나는 그 2초, 2초가 심장이 얼어붙어버릴것만 같았다. 고작 2초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나에게 덮쳐 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휴... 간신히 고깃집 앞으로 도착했다. 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계를 본다. 7시 55분이다.
이 시간이면 돼지가 먼저 와 있지는 않겠지...? 하고 주위를 훅 하고 둘러본다. 역시 그만둔다.
어이~ 83! 하고 낮익은 소리가 들린다. 왠일로 돼지 이 녀석이 시간을 지키네.
어.. 왔어? / 햐, 이 색히 보래. 언제까지 수염은 그딴 식으로 길러 댕길래. / 아.. 이거? 이거는 그냥... /
됐어, 임마. 들어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기분도 엄청 꿀꿀한데. / 어..? 그,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돼지가 나에게 다시 적응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하긴 자주 만나질 못했으니까.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