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원미동 시인
<지은이> 양귀자
<글의 특성> 일인칭 관찰자 시점.
<줄거리>
눈치가 빨라 이것저것 많이 알고 나이에 비해 매우 조숙한 ‘나’는 청소부인 아버지와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싸움질 잘하는 원미동 똑똑이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에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 선숙이 있고, 언니를 마음에 두고있는 김 반장과 시를 사랑하고 약간 돈 것같이 보이는 몽달 씨는 내 친구다. 김 반장은 가게 집을 하고있어서 ‘나’에게 군것질거리를 많이 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친구로 좋아하지만, 열흘 전 그의 치사한 행동을 보고 난 뒤엔 화가 나서 실망했고 그 후론 몽달 총각을 더 좋아하게 된다. 김 반장의 치사한 행동이란 어느 날 몽달 씨가 깡패들에게 맞아 죽게 생겼는데도, 김 반장이 자기 가게가 부서질까 두려워 끝내 몽달 씨를 돕지 않은 까닭이다.
지물포 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몽달 씨는 열흘 뒤 상처가 다 나은 다음 또 다시 김 반장의 가게에 나와 일을 한다. 그런 몽달 씨에게 나는 김 반장은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며 흉을 보지만, 몽달 씨는 계속 딴전만 피우며 시를 읊는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몽달씨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몽달 씨는 절대 미치거나 돈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보다 한결 마음이 순수하고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감상>
겉보기엔 답답할 정도로 한없이 어리숙해 보이는 원미동 시인 몽달 씨는 김 반장 같은 속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언제나 시를 읊으며 시처럼 맑게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나 역시 우선은 손해가 될지 몰라도 몽달 씨처럼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내 쪽에서 조금 더 손해를 보며, 남의 이득을 봐도 배 아파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으로 내 주위 사람들을 대했을 때, 그들은 내 진심을 알아주지 못했다. 나에게 매번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도 잘해주고, 얄미운 짓을 하는 사람에게도 마냥 친절과 아량으로 일관하기엔 내 인내심이 부족했다. 왜 나만 참고 손해를 봐야하는가. 저 친구는 절대 좋은 인격이 아니다 등등 내가 상대하는 친구들이나 사람에 대해 그들을 사랑과 이해의 눈길로 대하기보다는 비난과 원망이 먼저 튀어나왔다. 물론 내 좁은 소견머리 탓이겠으나.
그래서 작품을 읽는 동안 세상일에 대해 늘 바보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몽달 씨의 삶이 처음엔 한없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졌다. 그러나 차츰 몽달 씨가 결국 겉으로 보기엔 무척 바보 같아도 사실 속으로는 이 세상 모든 속물들의 추잡한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현자란 생각이 들었다. 잘나지도 못한 사람이 잘난 척, 똑똑치도 못 하면서 똑똑한 척 하는 세상의 속물들을 향해 몽달 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래, 그렇게 잘 난 척 하더니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구나!’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또 몽달 씨 얘기를 읽으며, 서영은의 소설 <먼 그대> 속의 주인공 ‘문자’ 생각이 났다. 독자가 보기엔 한없이 어리석고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두 인물들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닮은꼴인지.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속물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에 대해, 보통 사람 이상의 무한한 이해와 사랑의 눈빛을 보내는 점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사족 1: 이 소설의 서술방법은 주요한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연상시킨다. 두 작품 모두 어린 여자아이의 눈을 통해 사건을 서술해 가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는 단순히 주변의 사건들을 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 그대로 독자에게 전해 주는데 비해, <원미동 시인>의 재숙이는 자기 주변의 사건들에 대해 시시콜콜 비판을 하고 분석을 가한다. 옥희 보다는 재숙이 한결 적극적이고 활발한 서술자인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소설가들은 참 머리가 아플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는 물론 등장 인물들의 성격과 서술방법 등등. 하지만 내가 소설가가 될 것은 아니니까 괜한 걱정이다.
*사족 2: 지극히 위선적인 김 반장과 몽달 씨의 삶을 비교 분석해 본다. 확실히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김 반장처럼 위선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 같다. 반면 매사에 양보하고 손해보는 몽달 씨의 삶은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가.
학교에서의 내 생활태도 역시 두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나대로는 위선하지 않고 정의와 진실 편에서 매사를 공정히 한다고 했는데도 남들은 끝내 내 진실을 몰라주고, 위선과 내숭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은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잘도 칭찬 받고 사랑도 받는다. 어찌 보면 무척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내가 자신할 만큼 공명정대하고 솔직하며 착한 인간인 지는 자신이 없다. 그저 나 스스로 그렇다고 믿으며 살고 있을 따름이다.
난 세상을 몽달 씨나 김 반장처럼 어리숙하게도, 위선적으로도 살고 싶지가 않다. 그저 이들의 중간쯤 되는 자세로 사는 게 어떨까 싶다. 난, 절대 위선을 떠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고 싶진 않다. 아니 사실 나는 이 점에 대해 전부터 많이 생각해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난, 이렇게 살겠다!’ 하는 뚜렷한 긍정적 인생 지침이 서있질 않다. 그 대신 어떤 애로가 닥칠지라도 최소한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는 구체적 부정적 지침은 서있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