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하철을 싫어합니다. 앞뒤 꽉 막혀버린 캄캄한 지하동굴을 이리저리 헤짚고 다니는 것이 왠지 답답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두어야할지 막막한 두 눈동자는 너저분하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광고판에 박히다가도 이미 가야할 곳이 정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뻔한 지하철코스만 물끄러미 바라보곤 합니다.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종착역까지 몇정거장 남았는지 헤아리는 것밖엔 없습니다. 가끔씩 책이나 신문을 사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수선한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글자수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친구와 있을때에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화사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지하철문이 열리면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짝수, 홀수로 나누어 손목때리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컴컴한 어둠속을 가르는 지하철안에 나 홀로 있을때에는 외로움과 적적함이 물밀 듯 밀려오고 멍하니 핸드폰만을 만지작거린다거나 고개를 뒤로 젖혀 애써 눈을 감을 때가 다반사입니다.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지하철이 마법의 성 호그와트(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학교)로 가는 지하철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1997년형 아반테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구입한 1999년형 엑센트를 상대방의 무지막지한 돌격으로 폐기처분한 후 그 보상금으로 구입한 중고차입니다. 남들은 차를 구입하게되면 이리저리 자주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운전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전의 묘미를 알지 못하기에 저의 차는 전시용입니다. 그래서 저의 애마(자가용)는 오늘도 조용히 주차장에서 겨울잠에 푹 빠져있습니다. 아주 가끔씩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가야하는 경우와 주일날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갈 때만 곤히 잠든 애마에게 채칙질을 합니다. 어머니께서 합승하시는 날이 제가 운전을 하는 날입니다. 애초에 차를 구입한 목적도 그것이었기에 저의 애마는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버스를 애용합니다. 자가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저를 보고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그래도 저는 버스를 사랑합니다. 지하철은 정확한 시각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버스는 갈아타야하는 번거로움과 예측불허한 교통난으로 인해 다소 버겁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버스를 사랑합니다.
버스를 타면 제일 먼저 운전사아저씨께서 인사를 건넵니다. 간단한 목례를하고 준비해두었던 교통카드를 들이밉니다. 기분좋은 동그라미가 번쩍하고 빛이 납니다. 고등학교때만해도 안내양이라는 직업을 가진 누나가 있었습니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누나와 재미나고 유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 역할을 요금체크기가 대신하고 있어서 조금은 아쉽습니다. 운좋게 빈자리가 있으면 고단한 엉덩이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세상을 구경한다거나 준비해두었던 책을 읽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고 책을 읽다가 내려야할 정거장을 놓쳐서 서성거린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강화로 가는 버스속에서 김진명님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종착역에 다달았지만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버스에서 내린후 정류장에 홀로서서 독서삼매경에 빠진적도 있었습니다. 버스는 저에게 있어서 책속에 몰입할 수 있는 몇군데 안돼는 공간중에 하나입니다.
책을 읽다 지치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봅니다. 때로는 진녹색의 가로수가 보일때도 있고, 때로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이기도 합니다. 초가을에 지나가는 인공폭포는 도심에서 느끼기 어려운 자연의 백미입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포플러나무들사이에서 우렁차게 울어대는 매미울음소리를 들을때면 마치 제 자신이 빨강머리 앤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지기도 합니다.(빨강머리 앤은 드높은 가로수길을 마차타고 가면서 자신이 왕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비가 온다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의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총총걸음으로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이 마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쾌쾌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기는 하지만 창문을 조금만 열면 됩니다. 그러면 상큼한 비냄새가 온 몸을 정화시켜줄뿐만 아니라 투두둑 떨어지는 비의 향연을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때라든가,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이 있을때면 가끔씩 버스를 타고 한바퀴를 휘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곤합니다.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재정립하기에 버스는 참 좋은 장소입니다. 운전사아저씨의 취향에 따라 흘러나오는 구수한 트롯트를 느끼기도하고 아주 가끔씩은 클래식을 접하기도합니다. 씨끄럽게 다가올 수 있는 이 음악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도 버스를 탑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이 행복으로 결론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루일과를 마치고 되돌아가는 함박웃음 핀 버스안의 저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저는 오늘도 버스를 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