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디로 보나 대학 초년생 같지가 않았다.
차롬하게 빗어 내린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세련된 옷매무새가 그랬고
그녀의 걸음걸이 또한 정숙한 여인처럼 곧고 반듯했다.
그녀는 나의 통학 길의 중간 지점인 구포에서 항상 차를 탔다.
나는 통학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항상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 고개를 꺾고 있었지만,
때때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시골 풍경에 시선을 돌리기도 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구포에 먼저 가 있었다.
아침 통학 길엔 콩나물시루처럼 빼곡이 들어 찬 승객들로 인해 입구까지 만원을 이루었지만,
정류장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다 싣고 가는 것을 보면
그 당시 버스는 아마 고무로 만들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버스가 구포보다 한 정류장 앞선 곳인 대저에 닿으면
가슴은 벌써 두근반 세근반 쿵쾅거리는 것이
차라리 버스가 펑크라도 나 구포로 가지 말았으면 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구포에서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오면
학처럼 길게 빼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내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눈만 빠끔히 내 놓은 채 그녀를 찾고 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볼 필요도 없이 분홍색 스웨터를 잘 차려 입은 그녀는 단박에 눈에 띄었다.
행여 줄이 길어 뒤쪽이라도 서 있는 날은 그녀만 남겨 두고
버스가 가버리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치기도 했다.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학교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었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 애를 지켜보며 걷는 즐거움은
야릇한 설레임과 더불어 통학하는 또 다른 기쁨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학창 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간혹 친구들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날이면 이런 즐거움은 없어지지만
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그녀 또한 통학 시간이 빨랐으므로
언제나 둘만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를 뒤에서 보며 걷노라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고운 자태로
앞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왼손에는 항상 책이 몇 권 들려 있었으며,
타박타박 바른 자세로 걷는 모습에 눈을 빼앗기고 걷다 보면
어느새 정문 가까이 와 있는 나를 보곤 했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수업이 오후로 맞춰진 날은 나는 목욕을 하거나 이발을 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그녀를 버스에서 마주쳤다.
오후엔 버스 안이 제법 여유가 있었는데 그녀는 예의 그 반듯한 모습으로 내 옆에 섰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책에만 눈을 꽂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발개진 얼굴로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차린 그녀가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이 나에게 조금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종종 내 옆에 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시선을 둘 곳 없어 애꿎은 책만 뒤척이던 나는
버스가 내릴 때쯤이면 고개가 아파 목이 뻐근해져 왔다.
겨울 방학을 앞둔 늦가을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버스에 오르면서 굳은 결심을 하나 하였다.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고백하여 내 마음을 열어 보이리라.
아니,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하여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서로 다정하게 지내리라 다짐을 하였
다.
그날따라 버스가 만원이라 나는 뒷켠에 몰려
그녀가 구포에서 차에 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버스에서 내려보니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쥔 손을 다시 한번 움켜쥐며 걸음을 재촉했다.
내 곁에는 친구도 없었고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어 어느 정도 외모에 자신감도 있었다.
그녀는 대로변을 지나 막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항상 그랬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운 뒷모습에 걸음걸이가 이뻐 보이기만 했다.
저 멀리 약국이 보이고 인적도 드물어 나는 그 곳을 절호의 기회로 삼기로 하였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며 그녀가 거절할 때는 어떤 말로 적절히 대응할 것인지
마음 속으로 미리 순서를 정해놓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의 간격을 서서히 좁혀 갔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 갈수록 나의 걸음걸이가 중심을 잃고
부자연스러움을 느꼈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영영 프로포즈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 가까이 다가갔을 때 심장의 쿵쾅거림이 어찌나 컸던지
혹여 그녀가 이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불안하기까지 했다.
나의 거친 입김이 그녀의 귓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한숨을 토해내었다.
목소리가 떨려와 도무지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멈칫하다가 그녀를 그냥 지나쳤다.
나의 바보스러움을 뒤에서 지켜보며 웃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발끝이 돌부리에 자꾸 걸렸다.
그리고 뒤에서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나의 뒤를 계속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의 거리를 점점 벌려놓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 옆에 다가갔을 때 준비했던 말을 해야 한다는 당위감보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프로포즈한다는 것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비슷한 기회가 있었으나
나의 어설픈 프로포즈는 똑같은 경로를 거치면서 번번이 무산되고
그렇게 겨울 방학을 맞았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대지는 봄을 맞아 파릇파릇 생기를 더해가고 나는 어느덧 2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거대한 산처럼 내 앞에 턱 버티고 있었다.
1학년 때 실패한 몇 번의 프로포즈는 더 이상 그녀 앞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몇 번의 실패가 가져다 준 그녀의 낯설음이었다.
그녀는 차디찬 바위가 되어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1학년 때와 똑같이 변함 없는 모습이었지만 내 스스로 느끼는 마음의 변화였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가자 서로의 통학 시간이 엇갈려 자주 볼 수도 없었지만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느낌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단정하고 예쁜 모습으로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교정에서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친구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깔깔거리고 웃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의 마음을 기억해주는 그녀가 고맙게 와 닿았다.
그런데 여자는 왜 그럴까.
학년이 올라 졸업반이 되니 보기에도 탐스럽게 살이 토실하게 올랐던 볼이 홀쭉해지면서
턱이 길어 보였고 상대적으로 광대뼈도 튀어나와 있었다.
적당히 웨이브져 보기 좋던 머리는 뽀글뽀글 파마로 엉켜져 있었고,
풋풋해서 청순하기만 하던 얼굴은 덕지덕지 칠해진 화장으로 볼품 없어져 버렸다.
아마 그녀가 여전히 맑고 순수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면
4년 동안 말 한번 건넨 적 없는 그녀지만 일말의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텐데,
세월이 변모시켜 놓은 그녀의 얼굴은 졸업하면 못 보게 될 나의 마음을 오히려 편하게 해주었다.
졸업앨범을 꺼내 보았다.
나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 한때 나의 가슴에 사랑의 꽃씨를 뿌렸던 그녀.
아니, 그녀가 아니라 내 스스로 뿌렸다가 채 꽃도 피우기도 전에
뽑아야만 했던 미완성의 꽃이 되었던 그녀.
지금은 그 꽃이 나의 가슴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았는지 어렴풋하게도 그려지지 않지만,
아무튼 앨범 속의 그녀가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 나를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