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닐곱 살은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우리 집 헛간에 불이 난 적
이 있었다. 재에 남아 있던 불씨가 세찬 겨울 바람에 되살아나
변소와 아래채를 삼켜버렸다. 그 때 내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불
꽃의 난무는 두려움 이전에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 불이 가져다주는 재산적 피해와 공포감은 어린 나에게는 이
미 관심 밖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당황한 발걸음 그리고
고함소리. 그런 것들 모두가 불이 가져다 준 것이라는 것을 알
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어린 나의 머리 한구석에 심어 준 것이 있다면 나도 성냥개
비 하나만 있으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황홀한 불 구경
을 할 수가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의 호주머니에
는 항상 성냥이 들어 있었으며 나의 눈에는 추수를 끝내고 쌓아
올려진 짚더미만 자꾸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소한 불장난은 나
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유난히 불장난을 좋아하던 나는 겨울철이 되면 짚더미에 불을 놓
고 싶은 충동을 늘 가지고 있었다. 도벽이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가슴이 뛰듯, 추수를 끝내고 집집마다 수북히
쌓아놓은 짚더미를 보면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가슴에 일곤
했다.
특히 안마당이 아닌 바깥마당에 쌓여있는 짚더미는 한적하여 인
적조차 없으니 오히려 그 짚더미가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르곤 했
다. 그러나 잦은 불장난으로 아버지한테 여러 번 혼나기는 했어
도 큰불을 낸 적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벌써 주위는 캄캄해져 있고 나는 호주머니에
성냥 한 개피 감추고 슬그머니 동네로 마실을 나갔다. 벼농사로
살림을 꾸려가던 촌락이라 집에서 몇 걸음만 나서면 알갱이 없
는 빈 짚단으로 쌓아놓은 짚더미를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철이
철이니 만큼 볏단은 바삭하게 말라 있었고 불을 붙이면 금세 활
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호주머니 언저리에 머물던 내 손은 어느덧 안으로 빨려 들어가
성냥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불을 붙이고 싶지만 그
랬다간 그 파급효과가 무서웠다. 만약 들켜 아버지에게 혼줄이라
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것보다, 활활 타는 불의 기세가 주는 무
서움 때문이었다. 비록 누가 불을 내었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
이다.
그러나 어느덧 내 발걸음은 동네 한가운데 있는 어떤 짚더미 근
처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짚단을 보자 일단은 불을 붙이고 보
자 하는 용기로 이어졌고 아무도 없나 주위를 살핀 다음 볏단 끄
트머리에 삐죽이 나와 있는 지푸라기에 불을 붙였다. 불은 금세
파삭거리면서 옆으로 번져갔다. 불이 번져갈 때 가까이서 지켜보
는 긴장감과 흥분은 도둑이 물건을 훔쳤을 때의 그것과 맞먹으리
라. 그러나 불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기 전에 손으로 재빨리 짚
을 털어 버리며 불을 끄곤 했다.
하루는 그동안 눈여겨보아 둔 동네에서 제법 외진 곳을 목표로
정하고 오후에 집을 나섰다. 산에서 져다 놓은 나무가 산더미처
럼 쌓여있는 집이었는데, 그 땔감이 바깥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위치해 뒤로 돌아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을 놓기는 안성맞춤이
었다. 담벼락에 박쥐처럼 찰싹 달라붙어 한 걸음 한 걸음 그쪽으
로 다가갔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얼굴과 그만두어야 한
다는 두려움은 나의 발을 조금씩 떨게 하였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싶은 마음과 어떤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에 나의 어린 발목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쯤이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
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통나무로 울타리를 쳐놓은 돼지우리에
까만 수퇘지 한 마리가 그 가운데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
다. 담벼락에 붙어 올 때만 해도 아무 기척이 없어 돼지우리가
텅 비어 있는 줄 알고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다. 우리 집에도 돼
지 몇 마리를 키우는지라 별 무서움은 없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돼지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헛간에 불난 이후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불 구경. 그 불을 보고 싶었다. 나는 주위를 살필 겨
를도 없이 나뭇단 중에 낙엽이 많이 쏠려있는 것으로 골라 성냥
을 그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방향
이 어딘지도 모르고 한참을 뛰다 보니 도랑이 보였고 나는 도랑
에 일단 몸을 숨겼다. 겨울철이라 물기 없는 도랑에 조그만 아이
가 게딱지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언덕 위로 눈만 빠끔히 내놓은
채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
뭇단이 촘촘히 엮어져 있어서인지 연기만 모락모락 날 뿐 쉽사
리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뭇단 사이에서 불꽃이 보이는가 싶더니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뭇더미의 뒤쪽에 불을 놓았기 때문에 집 안의 사람
들은 한참을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기와 함께 불
이 나뭇더미의 반 정도 불에 타 들어갔을 때 집주인은 이제야 알
아차리고 밖으로 나와 물을 끼얹는 등 난리였다. 나는 내가 그
큰 나뭇더미에 불을 낸 주인공이라는 흥분과 타오르는 불꽃을 보
며 감회에 젖고 있었다. 이윽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며
또 고막을 찢는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린 내가 저질러 놓은 작품이
라는 것을 나는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태의 변화는 일순간에 일어났다. 언덕에 턱을 괴고 동
그란 눈만 내놓은 채 지켜보던 나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목격되
었다. 돼지가 매운 연기에 못 이겨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까만 털 여기저기에 불이
붙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돼지는 등의 따가움 때문에 이
리 뛰고 저리 뛰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까진 덤으로 하는 구경이라 볼 만했는데, 돼지가 어
느 한 곳을 응시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잡았다. 그리곤
돌진해 왔다. 아 글쎄 이 놈의 돼지가 나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도랑에 포복하듯 엎드려 있던 나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
다. 집주인의 시선은 자연히 돼지가 튀는 곳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내가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오씨 아저씨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나는 그 날
우리 집 굴뚝에 동아줄로 묶여 아버지한테 삽으로 죽도록 맞았
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돼지가 나뭇단에 가려 내가 불을 놓는 것을 보지 못했을 텐데
도 어찌 알고 그렇게 나에게 돌진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돼지의 지능지수가 낮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돼지
의 IQ가 어느 동물 못지 않게 높다는 것은 돼지를 키워 본 사람
은 다 안다.
12.20
어릴적 호기심이 불장난 되고 돼지의 아이큐에 붙잡혔군요.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2.20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12.20
글의 진행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는데 결국 일내셨군요. 시골에서의 어릴적 추억은 참으로 각양각색인거 같아 언제 들어도 재밌고 설레입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란 저에겐 언제나 동화같은 얘기들이지요.
12.21
에구 재미없는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심에 무조건 감사드립니다. 복받을 실 겁니다.(^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