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예전 같지가 않다.
저만치서 오는 줄로만 알았던 겨울이 성큼 들어와 버렸다.
겨울의 황량함과 시간적 여유는 사람을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나 보다.
텅 빈 가슴을 추억으로 채워보려는 욕심일까.
아무리 괴롭고 고단한 시절도 세월의 여울을 건너와 있으면 살만했고 즐거웠던 시절로 미화되는데
하물며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과거라면 얼마나 이뻐 보일까.
과거로 여행하는 김에 아주 어릴 적으로 가 보았다.
초등학교 사오 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사오 학년 시절은
학교 생활에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와 어떤 소녀에 대한 기억밖에 없다.
도회지에 살던 그 소녀는 여름 방학만 되면 시골인 우리 동네로 내려왔다.
그녀의 친할머니가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냇가의 수양버들이 한여름의 햇살에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고
그 옆에는 송아지가 풀을 뜯는 조용한 시골마을이 그 애에겐 무척 낯설고 그리웠던 모양이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내려와 방학이 끝날 무렵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애는 어떤 땐 단발머리 나풀대며 풋사과 같은 얼굴로 내비치기도 하고,
또 어떤 땐 귀밑머리 곱게 땋아 빗은 뽀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시골에서 투박하고 억센 모습만 늘 보아오던 나의 눈에 한 떨기 봉선화 같은 그 애는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나에게 기다림을 주었다가
방학이 끝나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고 가버렸다.
하지만 그 애는 여름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나에게 안겨 주었는데,
도시에서 잘 먹어 적당히 살이 오른 그 애는
시골에서 자라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명태처럼 비쩍 마른 내 모습과는 애초에 달랐지만
계집애답지 않게 달리기를 잘했다.
우리는 달리기로 승패가 판가름나는 '진놀이'를 즐겨하였는데 그 애는 매번 나를 따라잡았다.
잡히지 않으려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은 내 양발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 애의 손끝이 등허리에 와 닿는 짜릿함을 맛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느새 내 발걸음을 느리게 잡아놓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애의 달리는 수고를 들어주기 위해 일찌감치 잡혀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그 뒤로도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 없었던 나는 툭 하고 집적거리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앞서 달려야 했으며 그 애는 예의 그 빠른 발로 나를 뒤쫓아오곤 하였다.
밥짓는 저녁 연기가 뱀처럼 꾸불꾸불 하늘로 올라가던 어느 날 저녁,
대문 앞에서 바삐 왔다갔다하는 낯익은 물체가 보였다.
그 애였다.
그런데 서성대는 꼴이 내가 빨리 밖으로 나오기를 재촉하는 눈치였다.
불을 지피던 나는 아궁이에 짚을 대충 쑤셔 넣고 그 애에게 달려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 애는 물이 고여 질퍽거리던 신발을 벗고 발을 쑥 내밀었다.
신발에 피가 괴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애의 엄지발가락과 집게발가락 사이에 거머리 한 마리가 늘어붙어 있었다.
거머리는 피를 먹어 통통해져 있었고 살갗에 착 달라붙은 빨판 옆으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애는 도랑에서 거머리가 붙은 줄도 모르고 혼자 물놀이에 열중하다 뒤늦게
발견하곤 놀란 나머지 가까운 나에게로 달려온 듯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머리를 싫어하였다.
동네 아이들은 맨 발로 논이나 도랑으로 잘도 다녔지만
나는 거머리가 무서워 물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며,
꼭 물에 들어가야 할 경우엔 비닐로 칭칭 감고 들어가거나 들어가더라도 곧바로 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눈 가까이에 있는 거머리를 손으로 뗀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그 애는 나에게 발을 내밀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거머리의 모습과 감촉도 징그럽기도 하지만
신발에 괴어 있는 피를 보고 겁이 난 그 애는 내 눈만 쳐다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아무리 겁 많은 용사라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용감해지는 것일까.
나는 두 눈 찔끔 감고 손으로 거머리를 잡았다.
양끝 빨판으로 흡혈귀처럼 발가락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거머리는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거머리의 끈적한 감촉이 마치 뱀을 손에 잡은 듯하였다.
하지만 거머리를 다시 놓을 수는 없었다.
나의 머리 위에는 도랑에서 거머리를 본 순간부터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거머리의 배 부분에 갖다 대고 낚아챘다.
고무줄처럼 늘어지던 거머리는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거머리가 다시 내 손에 달라붙을세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짓눌렀다.
그리고 나는 승리감에 금방이라도 사나이가 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눈에 뵈지 않는 작은 구멍이 뚫려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그 애의 발가락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그 애는 그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곱고 흰 발가락은 내 손아귀에서 부끄러운 듯 꿈틀대고 있었다.
까만 고무신에 남아 있는 피의 흔적을 깨끗이 닦아내자 그 애는 총총히 집으로 뛰어갔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사라지기 전에 되돌아보며 웃는 얼굴엔 입가에 예쁜 덧니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방학이 끝나 그 애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사이로 그 애를 지켜보며 많이 안타까워했었다.
어린 나이라 금방 가슴에서 잊혀지겠지만,
그때는 늘 곁에서 함께 하던 소중한 것을 잃은 듯 아쉬움에
막대기를 가시덤불 사이에 끼우고 공간을 넓혀가며 그 애의 모습을 눈에 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탱자가시에 찔릴 정도로 눈을 가까이 대 봤지만 그 애는 아빠 손에 이끌려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탱자나무 밑동을 발로 툭툭 차며 어스름이 깔려올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애가 다른 도시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그 애의 사촌으로부터 전해들었을 때는
봄비가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흩뿌리는 늦은 봄이었다.
이제 그 애는 여름 방학이 되어도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그 뒤로 그 애를 볼 수 없었는데, 우연히 버스 안에서 성숙한 모습의 그 애를 보았다.
짧은 갈래머리에 하얀 칼라를 곱게 올린 교복을 입은 그 애는 어느덧 여고 3학년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의 모습을 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애가 버스를 내리려다 말고
버스 뒤쪽을 보며 웃으며 인사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보고 한 것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보았을 때는 나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차창을 통해 멀어지는 그 애를 보며 그 해 여름의 탱자나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동안 우리의 키가 두 뼘 이상 자랄 때 그 탱자나무는 회색빛 블록 담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그 애와 함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 어릴 적 감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지만,
가끔 추억의 문을 열면 탱자나무 앞에서 서성이던 내 모습과
상아처럼 흰 얼굴을 한 여전히 어린 모습의 그 애가 겹쳐 보인다.
12.26
아름답네요. 얼마전까지 시골서 살다 왔는데 나의 아이들도 그런 추억을 하나쯤 간직하고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이 순정만화속 주인공들은 어디서 뭘하며 이 겨울 저녁을 보내고 있을까?
12.26
모르겐님은 예쁜 추억 있으셔서 넘 좋으시겠어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져 가는게 추억 같아요....아무리 시간이 흘러두.........
12.26
순수한 감정으로 기억의 한켠에 오래토록 머무는 아름다운 추억이네요.잘읽었습니다.
12.27
모르겐님 글을 읽을때면 화가가 된듯하네여...저두 잘읽었습니다.
12.27
사랑과 추억이 담뿍담긴 글 잘 보고갑니다. 모르겐님의 글들만 보면, 늘 빙글빙글 웃음이 나요. *^________^*